퇴직메일 기깔나게 쓰고 야무지게 보내기
서론
"어디 가는 거야? 앞으로 뭐 할 거야?"
2022년 1월, 퇴사를 하는 나에게 무수히 쏟아지던 같은 질문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나에게는 그 어떤 계획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가요. 집에서 쉴 거예요."
대기업 7년 차에 호기롭게 회사 문을 박차고 나서는 것 치고는 조금은 멋없는 대답이다,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나는 2015년 8월에 입사했다. 입사 후 3일째에 나는 퇴사를 하고 싶었다. 이곳은 내가 원하던 회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말했더니 내 가랑이를 붙잡고 반대하셨다. 번 돈 다 써도 좋으니 1년만 참고 다녀보라고 했다.
1년 후, 나는 여전히 퇴사를 하고 싶었다. 그랬더니 2년은 다녀야 경력으로 인정된다고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2년을 다녀봤다. 여전히 퇴사를 하고 싶었다. 사표를 던졌다. 상무님한테 붙잡혔다. 원하는 팀으로 가게 해준다고, 퇴사는 하지 말라며 나를 설득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산소호흡기를 단 연명치료를 하는 환자마냥 나의 회사원으로서의 삶을 1년씩 연장해 갔다. 그렇게 합쳐진 시간이 총 6년 반.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는, 진짜 백수가 되었다.
퇴직 인사 기깔나게 쓰기
퇴직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절차가 있다. 사표를 작성하는 일부터 퇴직금을 지급받을 계좌를 만드는 일까지, 하나 같이 재미있게 했지만 내가 가장 기대했던 것은 바로 퇴직 메일을 날리는 일이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여기저기서 퇴직 인사 메일을 받아봤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퇴직 메일 예시를 뒤지며 알게 된 결론이 있다.
1. 회사에 대한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은 대부분 퇴직 인사를 짧게 쓴다.
2. 좋은 일로 떠나는 사람은 대부분 퇴직 인사를 짧게 쓴다.
따라서 초안을 다음과 같이 작성해 보았다.
안녕하세요,
고라니입니다.
2022년 1월 부로 @@@를 퇴사하게 되어 퇴직 인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했고, 앞으로 좋은 기회로 다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라니 드림
그러나 이렇게만 작성하는 것은 나에게 매우 힘든 일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100번은 참고 회사를 다녔는데, 회사를 퇴사하면서까지 참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하고 싶은 말을 다 꾹꾹 눌러 담아서 다음과 같이 작성해 보았다.
안녕하세요 ^__^
고라니입니다.
@@@에서의 6년 반 근무를 마무리하게 되어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대학 졸업도 안 한 풋내기에 불과했던 제가 어엿한 한 명의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분들의 공이 큰 것 같습니다.
나태해지지 않도록 엉덩이를 차준 선배님들 감사합니다. 7년 차가 되고 나니 후배에게 쓴소리를 하는 것도 꽤나 큰 애정과 용기가 필요한 일임을 깨달았어요.
좋은 자극을 주었던 후배님들도 감사합니다.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저도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었습니다.
늘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동료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유관부서 분들께도 정말 고생 많으셨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에 이런 명대사가 있습니다.
저는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태생이 모든 게 귀찮고 게으른 사람입니다.
급격한 변화를 싫어하지만 또 너무 평온한 것은 지겨워하는 모순적인 성향이어서,
그동안은 대기업이라는 편안한 둥지 안에서 살짝살짝 삶을 변주해 가는 식으로 6년 이상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네요.
그러나 어차피 돼지로 살아야 할 운명이라면,
그냥 돼지보다는 날아다니는 돼지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도전을 해보려 합니다.
회사에서의 값진 경험을 발판 삼아 날아오를 수 있도록 많은 격려 부탁드립니다 ;D
약간은 구구절절 말이 많기도 하고, 잘 쓰고자 애쓴 티가 나는 메일이 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CEO에게 전송하기
메일을 작성하고 나니 누구누구한테 전송해야 할지 고민이 커졌다. 물론 가까운 동료들과 유관부서는 당연히 리스트에 넣었지만, 업무상 자주 교류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도 보내야 할지 의문이었다. 내 퇴직메일이 다소 개인적인 성향과 취향을 담은 메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7년 간 회사를 다니면서 CEO를 실제로 마주한 적이 3번밖에 없다. 그는 전설적인 전문 경영인이었고, 나는 대리나부랭이였다. 당연히 메일을 보내본 적도, 메신저를 해본 적도 없다. 그에게 닿기 위해서는 팀장님, 상무님, 전무님을 통과하고 최종적으로는 CEO비서까지 통과해야만 겨우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 그래 CEO까지 메일을 보내는 건 에바야'
라는 생각이 들 수록, 점점 메일을 보내고자 하는 욕심이 생겼다. 갈 땐 가더라도 인사는 할 수 있잖아?
에라 모르겠다, 전송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의 답변
그리고 그에게 짧은 회신이 왔다. 기분 좋았다.
결론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본인을 고용한 주인님의 면상에 사표를 날리며 호쾌히 즈려밟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기에는 너무나 사회인이다. 뒤끝이 안 좋을 일은 절대 하지 않는.
내가 퇴직 메일을 CEO에게 보낸 이유는 나의 고생을 알아달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냥 나를 고용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그동안 많은 욕을 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달까.
아무튼 회사를 다니면서 연관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까마득한 어른이니까. 작별 인사를 올렸다. 아마 다시 돌아가도 꼭 퇴직 인사를 하지 않을까 싶다.
[입사는 기술, 퇴사는 예술]
약 7년 간 대기업을 다니며 지지고 볶았던 송사들을 두서없이 제 맘대로 엮어 내고 있습니다. 험난했던 입사부터 속 시원한 퇴사까지, 다사다난했던 회사 생활에 대한 회고록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