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해도 될 일을 열심히 해버렸다
첫 직장(?)에서 현명하게 도망친 뒤,
몇 개월 동안 이력서를 쓰고 넣기를 반복했지만 제대로 된 면접도 몇 번 보질 못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그 해를 넘기고,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나이는 한 살 더 먹었지만,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하고 있는 건 여전했죠.
(그 사이 주변 선, 후배들이 하나둘씩 취업이 되면서 불안감도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면접이 잡힐지 모르니 알바를 할 수도 없어, 용돈으로 생활하다 보니 길어진 취준 생활에 집에도 슬슬 눈치가 보이기도 했습니다.
새해가 되고, 1월 달이었던 것 같아요.
어울리지도 않은 투피스 정장에 구두를 신고 어색하게 직장인 코스프레 같은 모양새를 하고 면접을 봤고, 2월부터 출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회사는 직원이 9-10명 정도 되는 중소기업이었지만, 업력이 꽤 오래된 회사였고,
합격을 하고 첫 출근을 해 보니, 저보다 몇 살 어렸던 동기가 한 명 있었습니다. (의지가 되었었죠.)
회사는 작았지만 다들 슈트와 블라우스에 정장을 입은 팀장님, 대리님들을 보면서
아, 이제 저도 드라마 속에서만 보던 직장인이 된 것만 같아 기분이 꽤 들떠있었던 것 같아요.
또각거리는 구두를 신고, 말끔한 코트와 잘 다려진 셔츠를 입고 아침 일찍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길에 오르고, 12시엔 되면 수많은 직장인들 속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신다.
- 26살의 내가 생각했던 직장인에 대한 하찮은 상상 중 일부
겉에서 보기엔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옷도 평소에는 입지 않는 정장을 입어야 해서 불편했고, 사무실에는 제일 먼저 출근해야 했기 때문에 아주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야 했죠. 흔히 말하는 지옥철을 타고...
그래도 이제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는 날짜가 있다는 것과 1인분의 몫을 해낸다는 생각에 마냥 기분은 좋았습니다.
(아마 첫 월급으로 신입생 때 샀던 벽돌 같은 노트북을 버리고, 작고 가벼운 넷북을 샀던 기억이 나네요.)
아, 그리고 처음으로 저와 제 동기가 담당하는 업무(?!)도 생겼더랬어요.
1. 전 직원 사무실 쓰레기통 비우기
2. 난초에 물 주기
3. 오늘 날짜의 새로운 신문 디스플레이해놓기 - 전날 신문은 눈에도 띄지 않게 치워놔야 함
4. 사장님 출근하시면 음료 가져다 드리기(사장님이 드시는 특정 음료 2가지)
동기와 둘이 돌아가면서 이 담당 업무를 하게 되었고, 동기가 그만두고 나서는 오롯이 제 일이 되었죠.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기만 한 이 일을 갓 대학을 졸업한 여직원들에게'만' 시킨다는 게 1도 납득이 되지 않지만, 그때의 저는 참 속 없게도 이 일마저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제가 이런 일을 해야한다면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오겠지만,
만약 (지금의 의식이 없는 상태로) 다시 돌아간다면 저는 여전히 그 일을 열심히 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취준 생활이 길어지면서 어디든 취직해야한다는 간절함과, 신입이니까 이것 말고도 다른 일을 더 배우면 언젠간 이 일을 안해도 될 날이 올거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선배들이 이 일을 안한것처럼)
이제 도망보다는 타협하는 쪽을 택하게 되었죠.
그리고 두 번째(라고 하기엔, 첫 번째가 너무 짧았지만)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