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크리스마스 음식은 일주일 넘게 냉장고에 앉아있었다. 샌드위치 속재료로 만들어 최대한 많이 해치우기 위해 모두가 노력했다. 그래도 상해서 버리는 음식이 생겼다.
2020년 1월 1일도 다함께 축하했다. 샴페인을 따고 간식을 나누고 다시 한 번 큰 만찬을 준비했다.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찾아왔던 에런의 엄마 부부가 떠난 이후에는 새해 첫날을 함께 축하하기 위해 아빠 부부가 방문했다. 에런의 아빠와 재혼한 분은 영국인하면 생각나는 이미지 그대로인 분이었다. 극도로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으면서 '노'라고는 하지 않는 따뜻한 심성을 가지고 계셨다.
좀 생뚱 맞지만 그분의 전화번호를 노트에 받아놨었다. 샴페인을 많이 마신 날이라 그런지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내 인생에 좋은 사람들의 흔적을 좀 더 남겨두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조금 수상쩍은 부탁이었는데도 흔쾌히 번호를 주셔서 감사하고, 또 이상한 사람은 아닌가 걱정하셨을텐데 죄송한 마음도 든다. 그분과는 이후 종종 안부 문자를 나눴고 1년쯤 전 손자를 보셨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이때쯤 푸에르토리코에서 크리스티나가, 미국에서 리아가 도착했다.
몇달 만에 재회해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밤에 찬장에서 초콜릿 샌드 쿠키를 꺼내 먹으며 깔깔대곤 했다. 우리는 이미 초콜릿 범벅인 당분 초과 쿠키를 누텔라에 찍어먹는 충격적인 식습관을 공유했다. 크리스티나와 리아는 기껏해야 나보다 몇 살 많을 뿐이었지만 훨씬 어른처럼 느껴졌다. 키와 옷 등 외모적인 부분도 물론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나는 디즈니 주토피아의 주디 홉스 슬리퍼를 신고 다녔고(나름 한국에서는 품절 대란으로 구하기 어려웠는데...) 항상 화장기 없는 얼굴로 이리저리 조용히 다니는 150 중반 키의 꼬맹이였다.
한국에서도 어려보인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다가(좋은 게 아니다. 젊어보인다는 게 아니라 아이 같아 보인다는 이야기다) 앤드류는 나를 처음 봤을 때 열여섯 살 정도로 보인다고 했다. 이에 반해 크리스티나와 리아는 독립해서 연인과 함께 살고 일도 하고 본인 차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자란 또래들을 만날 때면 항상 뒤쳐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운전도 잘 못하고 집세도 내지 않고 대학도 아직 졸업하지 않았다. 모순되지만 평생 공부만 해서 아는 것도, 경험한 것도 많지 않다. 문화권에 따라 삶의 양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친구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비슷한 나이대 친구들과 와인 한 잔 하면서 초콜릿 한 통을 까먹고 있으니 간만에 친구다운 친구들과 수다떠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에런의 신장이 급속히 나빠졌다. 집과 동물들, 심지어 바이올라를 돌보는 일까지 겹쳐 버거워졌다. 크리스티나가 바이올라를 거의 친동생처럼 챙겨주고 나와 리아가 집안일과 동물들을 돌보았다. 더는 화학요법 치료를 미룰 수 없었다.
내가 아직 에런네 집에 있을 때 미셸과 앤드류가 찾아오기로 했었지만 에런의 건강 문제로 그것도 무산되었다. 내가 에런의 집을 떠나 뮌헨으로 향하기 하루 전 에런은 치료를 위해 영국으로 떠났다.
2020년 1월, 에런의 건강 악화로 모든 게 흐지부지되기 시작할 때 나도 프랑스를 떠나 독일로 향했다.
한창 파리 노란조끼 시위와 교통파업이 이슈가 되던 시기였다. 시내 지하철 입구는 아예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버스도 거의 다니지 않았다. 광역으로 다니는 TGV 철도는 운행 중이었지만 역시 취소와 연착이 심했다. 에런네 동네에서부터 파리까지 오는 것도 철도로는 불가능해서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던 카풀 서비스를 다시 한번 이용해야 했다.
연일 기차 취소 소식을 스마트폰 앱으로 실시간 확인하면서 제발 내가 타는 기차가 취소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행히도 플랫폼에 기차가 들어왔다.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스트라스부르로 이동하고, 거기서부터 버스로 프라이부르크를 거쳐 뮌헨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길은 멀고 어두웠다. 스트라스부르와 프라이부르크는 각각 프랑스와 독일 국경 도시다.
프랑스 동쪽 끝에서 버스에 올라 아무 표시도 없는 독일 국경을 건너는데 몇 명의 경찰들이 차를 세우고 올라타서는 한 사람씩 여권과 방문 목적을 확인했다. 누구는 내려서 건물로 들어가 질문을 받기도 하는 등 금방 끝날 줄 알았던 검문은 갓길에 잡힌 채 두 시간이나 이어졌다. 이후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빠져나갈 때는 아무 검문도 받지 않았는데 그때 경찰이 누군가를 찾고 있었던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테러 때문에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두 국경 도시에서 하루씩 머물며 구경한 뒤, 다시 버스에 올라 뮌헨으로 달렸다.
아담한 한국 지도만 보다가 서유럽 지도를 보면 거리를 가늠하는 감각이 일시적으로 망가져버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도로 볼 때는 가까운 것 같은데 막상 고속버스로 달려보면 굉장히 먼 거리임을 깨닫는 것이다. 프라이부르크에서 뮌헨도 350km가 넘는, 서울에서 순천까지 남한 땅을 남북으로 횡단하는 것보다도 조금 더 먼 거리지만 큼지막한 독일 땅덩어리로 보면 두 시간이면 충분해 보인다.
뮌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깜깜한 저녁이 되어 있었다.
언제나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그러하듯 등에는 백팩을, 한 손에는 캐리어를, 한 손에는 구글맵을 켠 스마트폰을 들고 숙소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혼자 다니는 (거지)여행자에게 택시는 쳐다도 볼 수 없는 사치다. 30분 이내라면 두 다리로 이동한다.
뮌헨 자체가 크지 않은 도시라 외곽 버스터미널에서부터 열심히 걸어서 도시 중심가에 위치한 호스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 배는 뭐라도 넣어달라고 아우성이었고 4인실 도미토리에 짐만 놓고 곧바로 터덜터덜 가장 가까운 마트가 있는 중앙역으로 향했다.
뮌헨 중심 상권이 곧 중앙역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뮌헨역에는 꽤 큰 가게들과 식당, 마트가 있었다. 바꿔 말하면, 조금 과장해서 중앙역이 중심 상권일 정도로 도시의 다른 부분이 심심했다. 중앙역과 그 근처가 가장 번화하고 밝았다. 나는 물과 샌드위치라도 살까 싶어 역내 마트에 들어갔다. 마트는 생각보다 비쌌고 마음에 드는 음식이 없었다. 도로 나오면서 아무것도 안 산 게 멋쩍어 괜히 살짝 미소를 지으며 점원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그만 앞으로 길이 기억할 장면을 마주하고 말았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캐셔 직원이 한쪽 어깨를 귀에 바싹 붙이고 손을 앞으로 내밀며 내게 악수를 청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동시에 입으로는 뭔가 중국어 같으면서도 중국어 같지 않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낄낄 웃고 있었다.
당황스러움에 미소는 싹 사라지고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순간 얼이 빠진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걸어 나와버렸다. 밤이었지만 역 내는 아직 환했고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무도 이 광경을 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이게 일상적인 광경인 것인지 나만 다른 공간에 툭 떨어져 충격 속을 헤매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바삐 갈 길 가는 것 같았다.
뮌헨은 터키와 동유럽, 이슬람 국가 출신 이민자가 많은 도시다. 거리에도 이민자가 운영하는 식당, 이민자를 위해 고국의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 여행자들, 이민자들을 눈만 들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중앙역은 하루에도 몇십만 명이, 그것도 상당수의 외국인들이 오가는 곳이건만 거기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게, 아니 이런 사람이 직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내가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개는 그들이 아는 아시아 국가가 중국 아니면 일본뿐이어서 그런 것이었고 그럴 때마다 기분이 좋진 않지만 딱히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불쾌하지도 않았다. 반면 이렇게 누군가 고의성을 띠고 모욕적인 인종차별을 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당시에는 충격으로 벙쪄서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고 그냥 걸어 나와버렸다. 다시 돌아간다면 정색하고 지금 뭐하는 거냐고 따질 텐데 하고 가끔 분하기도 하다. 밝고 사람 많은 중앙역이었고 위협을 느낀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싸움이 나더라도 내 편 들어줄 사람 한두 명 있었을 것이고 그 직원이 다시는 이러지 못하게 경찰을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말 분통 터질 때는 어둡고 인적 드문 골목에서 그런 일을 당했을 때다.
뮌헨은 베를린과 함부르크에 이어 독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라지만 전체적으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울적했다. 건물 사이 간격도 넓고 도로도 넓고 땅과 하늘 사이 간격도 넓은 듯 구름이 높이 떠 있었다. 차분함과 황량함 사이 무언가를 공기 중에 품고 있는 도시였다.
도착 다음 날에는 유럽여행 카페에서 구한 한국인 동행분을 만나 같이 돌아다녔다. 낯선 트램 발권기 앞에서 이것저것 눌러보며 헤매고, 새로운 음식을 먹으며 함께 깔깔대니 혼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재미가 느껴졌다. 백조로 가득한 님펜부르크 궁전 호수도 보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혼자서는 엄두도 못냈을 외식도 했다. 어두운 골목에서 길을 헤매도 둘이 있으니 무섭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숙소로 돌아가던 어두운 골목길이었다. 마주보면서 우리를 지나쳐간 서너 명 무리의 20대 초반 남자들이 우리와 엇갈려 지나가고 몇 초 후 이쪽을 쳐다보며 원숭이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기분 나빠서 뭐라고 하고 싶어도 밤 9시에 인적 드문 골목에서 남자 서넛을 상대로 큰소리를 내봤자 불리한 건 이쪽이었다. 결국 모른 척하고 지나간 뒤 우리는 서로 눈길을 교환했다.
"저희한테 한 거 맞죠?"
"네, 저랑 한 명 눈 마주쳤어요."
왜 인종차별에 대응하지 않냐고, 그냥 넘어가면 더 호구로 본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막상 그 상황을 눈앞에서 마주하면 너무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가 많다. 혹은 싸워봤자 나만 다칠 수 있어서 피하기를 택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놀림 받거나 소수자가 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인종차별을 겪으면 이런 일을 겪을 수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란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당하고 나면 어이가 없어서 힘이 빠진다. 인종차별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당사자가 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무력감이 들고 뮌헨이라는 도시에 정이 쌓이다가도 멈춘다.
인종차별에 적극적으로 화내지 않아서 심해지는 거라는 사람들의 말도 물론 맞다. 본인의 안전이 보장된 상황에서는 따끔하게 한마디 하는 게 괜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리하게 나서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일이 커졌을 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지, 폭력의 위험에 놓여있지는 않은지, 혹시나 경찰을 부르게 되었을 때 경찰을 믿을 수 있는 국가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옳은 말 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조심해야 하나 싶지만 일단 본인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단지 누군가의 피부색 때문에 죽을 때까지 사람을 때리는 이도 있다는 걸 인지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동행분도 나도 체구가 크지 않은 동양인 여성으로서 타지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우리는 단기적으로 가장 쉽고 안전한 길을 택했다. 속으로 분통은 터지지만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쫓아와 괴롭히진 않았다. 반응을 보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뮌헨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끝났다.
서유럽 국가 중에서 이민자와 난민에게 가장 오픈되어 있고 히틀러 이후로 인종차별을 죄악시하는 나라인 독일, 이지만 내게는 2박 3일간 1일 1인종차별만을 안겨주었다.
이후 지금까지도 메신저로 안부를 나눌 만큼 좋은 독일 친구를 만났고 모든 나라가 그렇듯이 독일이란 나라도 마냥 차갑고 인종차별로 가득한 곳이 아니라는 건 느낄 수 있었지만 첫만남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