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펜얼티밋 Feb 09. 2022

32. 사라



독일에서 한나와 이야기가 잘 통했던 것처럼 이탈리아에는 사라가 있었다. 사라와 지낸 기간은 2주 남짓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일년 반이 지난 지금도 가끔 안부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사라와는 말이 잘 통했다. 사라는 환경과 차별, 소외 등 사회문제 전반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포도밭에서, 사라는 도예 스튜디오에서 각자의 하루를 끝낸 후 저녁 6시쯤 주방에서 만났다. 저녁 메뉴는 점심 메뉴에 따라 달라졌다. 점심에 마시모가 요리해서 다 같이 먹은 메뉴가 남으면 그냥 그걸 데워먹기도 하고 남은 게 없으면 우리가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 먹었다. 먹고 싶은 요리가 있으면 주방 돈통에서 돈을 꺼내 동네 식료품 가게에서 장을 보기도 했다. 다른 워커웨이 스테이는 호스트와 함께 장을 보고 점심, 저녁을 같이 먹었지만 여기는 마시모가 수확한 채소나 본채에서 가져다주는 재료를 이용하고 모자란 식재료는 돈통에 넣어주는 돈으로 우리가 직접 장을 봐야 했다.




이것도 나름 쏠쏠한 재미였다. 동네 하나뿐인 차도를 따라 걸어가다보면 아파트 상가 편의점 정도 크기의 가게가 나온다. 사라는 빠르지 않지만 완결된 이탈리아어 문장으로 주인 아주머니와 소통했다. 아주머니는 영어 한 마디 없이 이탈리아어를 연습하는 영국 소녀를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블러드 오렌지도 이 가게에서 사는 것이었고, 마시모가 만들 수 없는 치즈라던가 캔 소스, 파스타면 등을 사왔다. 가장 기억나는 것은 바로 한국에서 '누네띠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스폴리아티네 글라사테' 과자였다(이름도 어렵다). 누네띠네처럼 생겨서 내가 기억하는 그 맛을 생각하고 '간식으로 괜찮지 뭐' 하고 샀으나 맛은 천지차이였다. 이탈리아 누네띠네의 맛은 한국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블러드 오렌지보다 맛있었다. 그 시골 마을의 손바닥 만한 가게에서 팔던 과자였으니 이탈리아 국민 간식, 고전 간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멍가게에서 육개장맛 포테토칩 같은 신제품을 찾는 것보다는 고구마깡 같은 오래가는 클래식을 찾는 게 그럴 듯 하니 말이다. 한국에 네 봉쯤 사올 걸 그랬다.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쯤은 이 작은 가게에서 장을 보고 각자 가방 하나씩을 든 채 불이 1초에 다섯 번은 깜박이는 고장난 가로등을 지나 걸어오곤 했다.




 주방에는 항상 펜넬 차가 있었다.  이탈리아 시골에서는 구할 수 없어서 영국에 있는 사라 가족이 보내주는 거라고 했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맛이 없었다. 그러나 사라가 한 번 차를 끓이면 나도 자연스레 같이 마시게 되었고 마시다보니 계속 들어갔다. 2주가 끝날 때쯤 되자 나도 펜넬 차를 좋아하게 되었더라는 이야기. 펜넬 차는 이제 사라의 냄새로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


사라의 집은 내가 영국에서 머물 집과 그리 멀지 않았고 나중에 꼭 영국에서 보자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나중에 실제로 사라 집에 초대를 받았다. 사라도 내가 귀국하기 전 미셸네 한 번 놀러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사라가 울먹이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사라는 항상 은은한 포스가 있으면서도 상냥한 사람이었기에 그녀가 울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라, 왜 그래?"


 사라는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나 더는 못 참겠어. 더는 못 하겠어."

 "뭘 못해?"


내 눈에 사라는 여기서 마냥 행복해 보이기만 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뒤에 그녀가 해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헬렌 아줌마 말이야. 나 그 분이랑 더는 같이 못 지내겠어. 너무 힘들어. 날 볼 때마다 욕하고 깎아내리기만 해. 내가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이게 무슨 말이지? 헬렌 아줌마? 나에게는 한국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으며 친절하기만 했는데...


알고보니 헬렌 아줌마는 지독하게 사라를 구박하고 있었다.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저녁 도예 클래스도 사실상 사라가 운영했고 뒤처리까지 다 했다. 사라의 대학교에서 연결해준 무급 인턴 자리이긴 했지만 하루에 8-9시간을 일하면서 청소와 잡일까지 다 해야 했다. 헬렌의 작품 준비와 흙 준비, 도예 물레 닦기, 바닥 닦기, 흙 옮기기, 때로는 7시까지도 늦어지는 작업장 마무리까지 모두 사라가 맡아했다. 그러면서도 사라에게 고맙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당연한 듯 사라에게 일을 시켰다. 사라의 도예 작업을 칭찬해주거나 구체적인 피드백을 주지도 않았다. 지난 6개월 동안 헬렌 아줌마의 비위 맞추기만 한 것 같다고 했다.


여기는 우리가 지내는 별채의 식재료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만드는 음식도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대부분은 그 날 점심에 남은 음식을 저녁에 먹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헬렌 아줌마는 점심에 먹고 남긴 음식을 사라가 저녁에 먹지 않으면 둘이 있을 때 화를 냈다. 그녀 말에 따르면 사라를 남은 음식 처리기이자 잡역부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라가 내게 울며 말하던 날, 우리는 그날 점심으로 어제 먹고 남은 야채볶음을 갈아서 콜리플라워 수프를 만들어먹었다. 사라가 요리를 해주었다. 야채, 콜리플라워 질색하는 나도 맛있게 먹을 정도로 괜찮은 수프였다. 무엇보다 모두를 위해 요리를 해줬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먹었다. 그러나 헬렌 아줌마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내 앞에서는 속이 안 좋아 점심을 먹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라와 작업실에 단 둘이 남자마자 그녀에게 화를 냈다고 한다. 자기는 곱게 간 수프를 좋아하지 않는데 왜 야채들을 다 갈아버렸냐고, 그러면 자기가 어떻게 먹느냐고 했단다. 


그리고 내 앞에서는 마냥 사이좋은 부부 같았던 마시모 아저씨와 헬렌 아줌마는 사실 이혼 직전이었다고 한다. 사라 말에 따르면 그들은 내가 없는 자리, 그러니까 사라가 있는 자리에서는 서로 험한 말을 주고 받고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내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던 날 오후에는 "그래, 이혼해!"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사라는 돈 한 푼 받지 않고 모든 고생을 감내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울면서 말하는 와중에도 "헬렌 아줌마가 나쁜 사람이라는 게 아니야. 아줌마는 훌륭한 도예가야. 작품도 정말 멋져. 감각도 탁월하셔. 그냥 나랑 아줌마가 소통하는 방식이 많이 다른 것 같아서 그걸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몇 달 동안 많이 노력해봤는데 나아지질 않아. 내가 소통하려고 할 때마다 아줌마가 나를 쳐내는 기분이야. 아줌마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좋아하셔. 그래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게 말로 하기 껄끄러운 것까지도 미리 터놓고 말하고 확인하고 했는데 나중에 내가 기억한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시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그래. 아줌마 욕은 하지 말아줘. 나쁜 분은 아니셔." 라고 했다. 사라는 끝까지 자기의 그릇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소름돋았던 부분은 헬렌 아줌마와 나의 독일 호스트 마리와의 유사성이었다. 정말 소름 끼치게 비슷했다. 나를 그냥 잡역부 취급했던 것부터 고마운 마음을 한 번도 표현하지 않은 것(고마워하긴 했는지조차 의문이다), 나중에 가서 원래 의논했던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사소한 것도 화를 내며 따지는 것까지 성격이 무섭게 똑같았다. 그리고 자기가 틀릴 리 없다고 확신하며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까지 말이다.


사실 나는 사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헬렌 아줌마를 조금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사라처럼 착하고 성실한 사람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라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6개월을 버틴 걸까. 


"내가 배우고 바뀌려고 했는데, 나만 노력하고 있어. 아줌마는 전혀 노력하지 않으셔. 이제는 나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수는 없을 것 같아."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도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해줘야 할지 몰랐다. 그나마 사라가 이렇게 털어놓을 사람이 있어서, 그리고 내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그러나 내가 헬렌 아줌마에게 가서 따져물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같이 맞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줌마 몰래 사라를 도와주고 응원해주는 것뿐이었다.




앞전에서 나는 마리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마리는 나와 의사소통 방식이 많이 다른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던 것 말이다. 사실 여기에는 나의 이중적인 면이 드러나있다.


나의 한 면은 마리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면은 마리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불합리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저 의사소통 방식이 많이 다른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진심에 좀 더 가까운 게 뭐냐고 묻는다면 첫 번째 면이라고 할 것이다. 나는 마리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솔직히 그녀가 싫었고 혼자 있는 게 좋았다. 의사소통 방식을 떠나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타인을 그렇게 대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의 기준에 도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를 원망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의 잘못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게 왜 더 눈치 빠르게 행동하지 않았지? 왜 부탁하지도 않은 빨래를 널었지? 왜 워커웨이 호스트를 호스트로만 대하지 않았지? 왜 뭔가를 기대했지?


상반된 두 생각을 가지고 나의 의견을 정립하기가 쉽지 않았다. 둘 모두 조금씩 찔려 어떤 의견으로도 정착을 하지 못했다.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분명 마리도 잘못이 있다는 생각에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마리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뭔가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마리가 의도한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따지고 보면 내가 잘못한 게 0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한 달을 유지하다가 사라를 만났다. 사라의 이야기를 듣고나자 그 동안의 내 편협한 사고가 정리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사라는 본인도 잘못이 있고 마리도 잘못이 있으며, 둘 모두 더 나은 상황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고 믿었다. 누구의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둘의 의사소통 방식과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많이 다를 뿐이었다.


열쇠는 구체적인 의사소통이었다. 말하기 껄끄러운 문제라도 일단 꺼내놓고 이야기하는 게 뒤탈이 없다.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둘 다 말해봐야 안다. 한 쪽이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도 건강하지 않다. 눈치껏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다가 오해만 쌓인다. 나도 그랬고, 마리도 그랬다. 사라와 헬렌 아줌마도 그랬다. 오해가 커져서 감정이 쌓이고, 부정적인 감정은 색안경을 만든다. 사라가 말했듯이 어려운 문제다. 해결법도 어렵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자란 나처럼 뭐든 대놓고 말하지 않고 눈치껏 알아채서 하는 데 익숙한 사람은 이런 방식의 의사소통이 힘들다. 내 의견을 말하기도 어렵고, 다른 사람 의견에 반박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방법이 이것뿐이다. 아니면 나와 의사소통 방식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일이 꼬이기 쉬워진다. 한 사람은 직설적이고 다른 한 사람은 속으로 삭이는 성격이라면 그게 최고 골 때리는 조합이다. 딱 나와 마리였다. 


나와 마리의 문제가 어쩌면 의사소통 방식의 차이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사라를 만나고서야 깨달았다. 사라는 성숙하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어른이었다. 물론 잘 되지 않아 나에게 털어놓고 있는 중이었지만 내 눈에는 사라가 아주 멋있었다. 영국 사회도 그렇게 직설적인 사회는 아니다. 우리보다는 아닐지라도 한참 돌려말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눈치를 주고 상대도 눈치껏 한다. 이런 사회에서 살던 사라가 굉장히 직설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가진 상대에게 맞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텐데 일단 시도를 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이렇게 또 배웠다.


이후로는 마리가 밉지 않다. 마리에게는 마리의 삶이 있고 그녀에게 당연한 의사소통이 있다. 나에게는 내게 당연한 의사소통이 있다. 우리의 가치관은 거의 정반대였다. 그녀는 잡역부를 원했고 나는 문화교류를 원했다. 어쩌면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이다. 우리 둘은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었고 다른 상태에서 만났으니 그런 일이 생겼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사라가 원했던 것처럼 서로가 할 수 있는 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의사표현을 하는 일이었으리라. 이건 한 명만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헬렌 아줌마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라를 탓하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사라가 내게 이 이야기를 해줄 때도 사라는 아직 작업실 청소를 해야 하는 상태였다. 여섯 시 반이었지만 사라의 업무는 끝나지 않았다. 


일단 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펜넬 차를 끓여 마셨다. 집에는 우리뿐이었고 사방이 고요했다. 식탁 위에는 언제고 마실 수 있는 레드와인 한 병이 놓여있었다. 청소 마치고 꼭 와인을 따리라 마음먹었다. 나는 사라의 든든한 아군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앞장서서 작업실로 내려가 대걸레를 꼭 쥐었다. 내가 걸레질을 시작하자 사라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곧 그녀가 작업도구를 씻는 달그락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이렇게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묘한 동지가 되었다. 나는 그 날 이후로 사라의 기분과 안부를 부쩍 자주 물었고 헬렌이 출장이라도 가는 날에는 함께 웃으며 정원 가위를 차고 밭일에 나갔다. 사라는 작업실에 있을 때보다 밭에서 포도나무를 돌볼 때 더 신나 보였다.


이렇게 사라와 가까워질 동안 내가 이탈리아를 떠날 날도 가까워져갔다. 


이탈리아의 코로나 바이러스 일일 확진자 수도 무섭게 올라가고 있었다. 이탈리아 정부가 이동금지령을 내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사라도 곧 이탈리아를 떠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31. 와인과 도자기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