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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얼티밋 Feb 23. 2022

34. 영국에서 코로나 검사


 영국에서 보낸 생일은 완벽했다.



 미셸은 Chocolate to death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꾸덕꾸덕한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어주었고 한국에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하고 예쁜 스타일의 텀블러를 선물로 주었다. 스파클링 와인을 따라주며 생일 카드도 건네주었다. 이 사람들 정말 왜 이럴까, 잘해줘도 너무 잘해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워커웨이 호스트가 내게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주고 파티를 열면서 스파클링 와인을 따라줘야 할 의무 따위는 전혀 없다. 아마 그들이 나를 워커웨이어라기보다는 일을 도와주는 친구이자 손님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후 다가올 코로나 락다운 중 5개월을 함께 보낸 후인 지금은 정말 친구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 전에는 정말 강한 부채의식이 있었다. 지금이라고 부채의식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때는 그들이 내게 해주는 것에 비해 충분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매일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 모든 것을 받고 열이 나는 것을 느꼈을 때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이탈리아에서 오는 나를 믿고 문을 열어줬는데 내가 바이러스를 가져온 게 된다면 어떡하나. 두통도 살짝 있었다. 미치겠다. 다들 즐겁게 웃으며 와인을 마시고 있는데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한다면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점점 얼굴이 굳어갔다. 앤드류가 내 표정이 이상한 걸 눈치채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나... 열이 나는 것 같아."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곧 앤드류가 온도계를 가져왔다. ...37.6도. 열이 있었다.


 나는 그대로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닫고 혼자 방에 틀어박혔다.


 


 나를 받아준 이들에게 못할 짓을 했다. 환영해준 사람들의 집에 코로나를 가져왔다. 나는 일을 도와주러 온 워커웨이어였지만 졸지에 방에서 나오지 못해 도움만 받게 생겼다. 미안함에 눈물이 계속 났지만 미셸과 앤드류는 내가 코로나에 걸렸을까봐 무서워서 운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2주 동안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고양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누가 가져다주는 음식만 먹을 수 있고, 화장실도 쓸 때마다 락스로 닦아야 했다. 원래 이것도 안 되지만 그때 영국은 자가격리에 대해 잘 몰랐고 안전불감증도 심했다. 2미터만 지키면 모두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나도 그랬다.


 그렇게 나는 워커웨이 호스트의 집에서 혼자 방에 갇혔다.




 우리는 날이 밝자마자 코로나 방역본부라고 하기도 뭐한 당시의 조악한 영국 질병관리본부에 전화를 걸어 앞으로의 절차에 대해 물어봤다. 내 코로나 검사도 예약했다. 이때부터 무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질병관리본부 콜센터에서는 검사 예약이 가능한지 3일 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 알려주겠다고 했다. 일단 그게 3일이나 걸릴 일인지도 의문이었지만 3일이 지나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우리는 4일째 저녁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질병관리본부 측은 내일 알려주겠다고 했다. 검사 결과도 아니고, 검사 예약이 가능한지 아닌지를 5일 걸려 알아내는 건 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5일째 아침, 그들은 그날 점심 12시 30분까지 OO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당일에, 그것도 평일 정오에 갑자기 약속을 잡아버리더니 그때밖에 안 된다고 하는 말에 좀 어이가 없었다. 앤드류나 내가 프리랜서가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한국의 정부 서비스가 잘 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이민 간 사람들한테 많이 들어봤지만 설마 외국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귀국 후에 정부24 홈페이지에 들어갈 일이 생기거나 코로나 백신 예약을 할 때, 정부 보조금 신청할 때마다 정말 깔끔하다고 새삼 느낀다. 외국 나가면 이건 정말 그리울 것 같다.


 두 번째 문제는 병원까지 가는 것이었다. 장롱면허인 내가 운전을 했다가는 사고가 날 것이다. 그렇다고 누가 데려다주면 그 사람도 내가 가지고 있을지 모를 바이러스에 노출된다. 또 한 번 민폐를 끼치게 되었다. 결국 앤드류가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데려다주기로 했다. 가서 앤드류까지 검사를 받아야 할 터였다.


 



 우리는 차를 타고 30분 정도 떨어진 사립병원에 설치되어있는 질병관리본부의 검사센터를 찾아나섰다. 병원을 두 바퀴를 돌았는데도 안내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보니 여기가 맞으니 잘 찾아보라고 했다. 다시 한 번 천천히 병원을 돌았다. 정말 눈에 불을 켜고 찾으니 구석 주차장에 컨테이너 하나가 덜렁 있는 게 보였다. 컨테이너에는 코로나 검사 센터라고 적혀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당시 영국이 코로나에 어떻게 대비했는지를 알 수 있다. 중국과 한국, 이탈리아까지 코로나로 고생하는 것을 봤지만 영국 정부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코로나 검사 센터를 찾아가는 안내판 하나 없었고 검사를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기 위해 3-5일을 기다려야 했다.


 그때는 마스크라는 개념도 없었다. 검사 센터 직원을 빼면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고 마스크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나도 코로나 바이러스 보균 의심자로 검사를 받으러 왔지만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었다. 검사 센터 직원들도 내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걸 보고 뭐라고 하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컨테이너로 들어가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무장하고 있는 간호사가 보였다. 나는 의자 하나 있는 흰 방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검사는 한국에서 하는 것과 비슷했다. 금방 끝났다.

 사실 나는 비용을 걱정하고 있었다. 영국 국민들은 NHS(National Healthcare Service)라는 정부 서비스를 통해 모든 의료 서비스를 무료로 받았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서 여행자보험에 들었을 뿐 NHS에는 의료 보험을 내지 않았다. 여행 비자 입국자는 의료 보험료를 낼 수도 없다. 내 여행자 보험이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비용을 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이 NHS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바로 전문의에게 갈 수 없다. 한국은 피부과, 안과처럼 전문의가 개업을 해서 개인 병원을 운영하기 때문에 손쉽게 그곳에 가면 되지만 영국은 먼저 GP(General Practinioner)라고 하는 동네 의원을 먼저 거쳐야 한다. GP가 주치의 격이다.


 간호사는 내 코를 한 번, 목을 한 번 찌르고 나서 당연하게 "담당 GP에게 결과를 확인하시면 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내게는 GP가 없다. 저 GP 없는데요, 라는 말에 간호사는 적잖이 당황하더니 다른 직원과 상의를 하러 나갔다. 곧 돌아온 간호사는 내 인적사항을 다시 확인했다. 물론 이름, 전화번호가 다였다. 내 신분증 또는 여권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애초에 주소나 국적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전화로 결과를 알려줄게요. 이틀 정도 걸릴 겁니다."라고 말했다. 걱정하던 비용은 청구되지 않았다. 외국인에게 공짜로 해줄 것 같지는 않은데 당황해서 비용 청구를 잊은 것일까.




 내 검사가 끝났다고 끝이 아니다. 차에 있는 앤드류도 검사를 받아야 한다.

 

"저기요, 차에 저를 이곳에 데려다 준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도 검사를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그랬더니

 "안 됩니다. 콜센터에 다시 전화를 걸어서 인적사항을 먼저 보내주셔야 해요. 그래야 저희가 정보를 전달받아서 검사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인적사항을 여기에 바로 남기면 안 되나요?"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되죠?"

 "그 정보를 저희가 전달을 받아야 통에 붙이는 스티커가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코로나 의심으로 방금 검사를 받은 저와 같은 차에 있었는데도 검사가 안 된다는 거예요?"

 "네."

 "그럼 그 5일을 집에 가서 다시 기다리라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그 동안 일상생활을 못 하잖아요."

 "증상 없으시면 그 분은 자가격리 안 하셔도 됩니다."

 "저랑 같은 차를 타고 왔는데요?"

 "괜찮습니다."


 영국 질병관리본부에서는 스티커를 받아야 하니 콜센터에 전화를 걸고 5일을 다시 처음부터 기다리라고 했다. 나와 똑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말이다. 당사자가 바로 앞에 와 있어서 바로 인적사항을 넘겨주면 되는데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럼 우리가 콜센터에 바로 전화를 걸어 검사센터로 즉시 인적사항을 넘겨달라고 할 테니 검사를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봤으나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무조건 5일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검사 센터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고 나 말고 다른 검사자는 없었다. 파리 날리도록 한가했다. 앤드류는 마스크 없이 차 옆자리에 탔으니 밀접접촉자인데도 자가격리가 필요없다고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결국 다시 차를 타고 돌아와야 했다. 나는 다시 격리에 들어갔고 앤드류는 최대한 바깥에 나가기를 자제하면서 일상생활을 했다.



 이틀 후 결과가 나왔다. 음성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소리를 질러대며 앤드류와 조안을 얼싸안았다. 그들에게 바이러스를 가져온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앤드류도 검사를 받지 않아도 됐다. 조안과 내가 얼싸안고 꺅꺅 대고 있으니 앤드류는 시끄럽다며 방을 나갔다. 하지만 그도 웃고 있었다. 어깨 위의 짐 하나를 던 듯한 기분이었다.

 

 파란만장한 일주일이었다. 나는 그 일주일 동안 누군가를 만질 수 없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고양이조차 쓰다듬을 수 없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느꼈다. 그리고 내 나라와의 애증의 관계를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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