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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얼티밋 Mar 02. 2022

36. 영국 록다운에 갇히기를 선택하다


 이탈리아가 봉쇄됐다. 하룻밤에 800명이 숨졌다.

 영국의 코로나 확산도 심상치 않았다. 여기도 2주 이내로 봉쇄에 들어갈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봉쇄는 한국의 지침이었던 외출을 삼가는 정도가 아니다. 록다운Lock Down, 말 그대로 나라 전체가 올스탑이다. 필수 업종(식료품 가게, 카센터, 주유소, 병원 등)을 제외하고 식당과 일반 상점은 문을 닫아야 하고 외국 국적자의 귀국 등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온 나라가 조용해진다. 록다운이 한 번 시작되면 귀국도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외국 국적자이기 때문에 출국은 가능할 테지만 공항까지 가는 일이 어려울 것이다. 귀국하려면 지금 가야한다. 영국이 록다운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국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막상 가자니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이제 출국 세 달째였는데 이대로 돌아가면 덴마크 여행과 향후 여행지도 포기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대로 여행을 강행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지만, 이 때가 2020년 3월이었다는 것을 고려해주시길 바란다. 코로나도 몇 달이면 끝날 줄 알았고 내 비자가 끝나기 전에 덴마크로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걸리는 점이라면 록다운 몇 달 동안은 꼼짝없이 이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셸과 앤드류와 지내는 건 1년이라도 가능하지만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랐다. 아무리 편하다 해도 나는 외부인이고 가족이 아니다. 헬스장에서 퍼스널 트레이너로 일하는 미셸은 코로나 직격탄을 맞을 터였다. 가족의 수입이 줄어들 것이다. 이 상황에서 군식구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게 괜찮을까? 미셸과 앤드류는 괜찮다고 말했다. 자기들은 괜찮으니 결정은 나의 몫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이라면 누구에게라도 괜찮다고 말했을 것이다. 내 기분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들만 괜찮다면 나도 몇 달이 될지 모르는 영국 록다운을 여기서 보내고 싶었지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루 동안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들이 한 말이 진심일까 아닐까 의심했다. 여태까지 나를 대했던 태도로 미루어보아 진심으로 내가 몇 달 더 있어도 상관없는 걸까, 아니면 내 기분 상하지 않게 말만 한 것일까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알 수 없었다.


 그때 똑똑, 누가 방 문을 두드렸다. 열린 문 앞에 앤드류가 서 있었다.

 

 "마음 정했어?"

 "아직 생각 중이야."

 "그럼 다행이다. 이거 말해주러 왔어.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에게 짐이 될 일 없어. 너와 함께 지낼 수 있으면 우리에게도 좋은 일일 거야. 그러니까 우리 걱정은 하지마. 넌 절대 짐 같은 거 아니니까 쓸 데 없는 걱정 하지마. 알았지? 네가 진심으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꼭 돌아갈 필요 없어. 다 너한테 달렸으니까 딱 네 마음만 고려해. 다른 건 신경 쓰지마."


 내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았던 걸까. 앤드류가 이렇게까지 말해준다면 아마 진심인 거겠지. 진심이라고 믿을래. 마음 굳혔다. 몇 달이 될지 모르는 록다운을 영국에서 버텨보기로. 그렇게 나는 2020년 코로나를 영국에서 보내게 되었다. 





 실제로 2주 정도 지나서 영국 전체가 록다운에 들어갔다. 한국에는 한 번도 록다운이라는 게 없었다. 장사가 안 되어서 문을 닫는 가게는 있었지만 일부 사업장을 제외하고 국가가 문을 닫으라고 해서 장사를 접는 가게는 없었다. 학교도 문을 닫았다. 비대면 수업이 아니라 아예 수업을 안 했다. 집에서 부모들이 국어, 수학 등을 가르치고 숙제까지 내줘야 했다. 물론 아침마다 아이들을 자리에 앉히는 것부터 전쟁이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보다 부모의 말을 더 듣지 않는다. 집에 있으니 신경도 이리저리 튀고 집중도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전문 과목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른다. 한국에도 당장 내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라고 한다면 쩔쩔매는 부모들이 많을 것이다. 영국도 다르지 않았다. 연예인이라 할지라도 다를 것 없이 아이들 교육에 쩔쩔맸다.


 급기야 나까지 투입됐다. 앤드류와 내가 원래 하려고 했던 집 개조 작업은 홈 데코 재료와 도구를 파는 상점이 문을 닫으면서 잠정 중단되고 말았다. 이미 가진 재료들 몇 개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지만 그리 많지 않았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단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을 책상에 앉게 만드는 일이었다. 


 초반에는 아이들의 루틴을 잡아놓기 위해 시간표를 만들었다. 그러나 갈수록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흐지부지 되었고 시간표도 없어지고 말았다. 결국 학교가 다시 문을 열 때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 일과라고는 장미덩굴을 정리하거나 텃밭에서 잡초를 뽑는 정도였다. 


 나는 워커웨이어로 도움을 주러 왔는데 막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청소와 요리, 빨래를 더 열심히 했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받기만 하는 기분이었다. 힘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은 더 제한됐다. 앤드류가 나는 결코 되지 않을 거라고 했던, 바로 그 짐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무력감과 미안함은 한 달 넘게 지속됐다. 이런 감정들은 나를 더욱 소극적이고 움츠러들게 했다. 이때 나를 도와준 건 예상 밖의 영어공부와 조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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