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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름 Jul 08. 2021

문학평론가의 글에는

밤이 선생이다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산문]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산문]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소설을 읽고 나서 맨 뒤에 실린 평론가의 ‘해설’을 읽으면 주눅이 들어버리곤 한다. 말로 설명하긴 어려워도 소설을 읽고 나면 나에게도 어떤 ‘생각’이 들거나 ‘감정’이 찾아오곤 하는데, 그것들이 평론가의 해석과 하나도 일치하지 않으면 내가 책을 잘못 읽은 건가 싶어진다. 그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창피한 생각까지 든다. 무지는 수치스럽고 오독은 두려운 것이다. 나는 해설을 비판적으로 읽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편이어서, 해설에서 읽고 이해한 것을 마치 내가 그 소설을 읽으면서 이해한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있고, 처음에 들었던 생각을 수정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에 와서는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는데, 작품을 통해 느낀 나의 첫 느낌을 그렇게 쉽게 수정해 버리는 건 한참 공들여 그린 그림에 물감을 들이붓는 일처럼 무자비하고 어리석게 느껴진다. 해설을 읽지 않고 책을 덮어버리려고도 해봤지만 그건 그것대로 찝찝함을 남긴다. 책 안에 읽지 않은 텍스트를 남겨 놓는다는 건 그 책을 끝마치지 못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남아 있는 해설 부분을 대충이라도 훑어보고 난 후에야 이쪽도 저쪽도 아닌 개운치 못한 기분으로 책장을 덮는다. 이제 이 책을 다 읽긴 읽은 것이다. 누가 읽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반복해 온 건 완벽주의자라거나 거기 있는 해석을 모두 내 걸로 만들어서 평론가가 되겠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소설이라는 건 읽고 나면 원래 모호하게 마련인데 그 모호함을 구체적으로 손에 쥐고 싶다는 어리석은 욕심 때문이다. 모호하게 남은 그것이 모호한 상태인 걸 참을 수 없는 거다. 내 안에 모호하게 남은 어떤 느낌이나 감정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을 때, 번호까지 매겨가며 조목조목 정리한 반듯하고 고매한 문자의 향연 안에서 나는 매번 패배하여 작아진다. 거기 쓰인 말이 진리가 아니고 문학에는 해답이 없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글은 해답처럼 기능한다. 내가 느끼거나 발견한 무언가가 거기 정리되어 있으면 정답을 맞힌 것처럼 어깨가 펴진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깊은 철학과 세상이 거기 이러이러하게 들어있노라고 밝혀져 있으면 좁은 지식으로 얕은 사고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한다. 정답률은 형편없으므로 해설을 읽고 나면 언제나 좌절한다. 게다가 내가 가졌던 모호한 느낌은 해설을 읽고 나서도 구체적으로 언어가 되지 못한다. 실패의 연속이다. 


어떤 소설은 읽고 나면 ‘대체 이게 뭔 소리지?’ 싶을 때가 있다. 소설을 쓴 의도조차 짐작되지 않을 때가 있다. 단편집에 실린 모든 소설이 그럴 때도 있다. 그럴 때 해설을 읽으면 도움이 된다. 완전히 오리무중인 산속에 빛이 반짝이는 길이 환하게 열린다. 길을 따라서 그냥 걸으면 무사히 산에서 내려올 수 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 문장과 저 문장이 그러한 훌륭한 철학에 바탕하고 있었군 하고 수긍한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나는 이미 아무것도 제대로 읽지 못했는데 그 해석을 이해한다 한들 사후약방문이다. 길 외에는 산의 어떤 모습도 보지 못했는데 그 산에 갔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런 독서의 실패와 사후 학습이 다음 독서에 도움이 될는지 모른다. 오기에 차서 소설을 공부하듯이 읽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설을 공부하듯이 읽을 이유가 있나? 나는 그저 소설을 좋아하는 평범한 독자일 뿐인데 말이다. 


소설을 공부하듯이 읽고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공부한 사람다운 글을 쓰는 건 평론가의 일이다. 평론가들은 나에게 권위적인 존재다. 나보다 훨씬 많이 공부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문학 사조,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과 근대 철학자의 책 어딘가에 쓰여 있다는 문장까지를 자유자재로 발췌하여 적재적소에 활용해가며 자신의 논지를 관철하는데, 문외한인 일반 독자는 그저 감탄할 뿐이다. 전공도 하지 않았고 열정적으로 독학한 것도 아니니 공부의 수준이 낮은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나는 왜 그들의 권위에 눌려 있는가. 비교 대상도 아닌데 왜 나의 수준과 그들의 수준을 비교하여 스스로 괴로워하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나도 잘 읽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 깔린 열등감의 근원은 소설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이고 제대로 읽고 싶다는 욕망이다. 


이쯤 되면 ‘그럼 가서 공부를 하거라’ 하고 대학원 입학처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싶은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그런 말을 들었다 치고 이렇게 답할 테다. 아, 그 정도는 아니고. 


이제 저 무책임한 한 마디로 인해 이 글은 어리광이 되었다. 하고 싶은 건 많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서 나는 뭐 하나를 딱 선택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이미 늦었다거나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얼마나 게을러 보이는지 잘 알고 있다. 사람마다 가진 특질이 다르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지만 미리 한계를 정해놓고 선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 역시 어리석은 짓이라고 누군가는 지적할 수 있다. 그러면 왜 한계를 시험해야 하느냐는 반문도 가능하다. 이렇게 하나의 문제에 대해 자기 생각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부딪치며 갈등하고 싸우며 깨닫는 게 세상이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변하기도 하고 변하지 않기도 한다. 그냥, 그런 거다. 그래서 차라리 나는 지금, 우유부단한 인물이 늦은 나이에 평론가가 되기로 결심함으로 인해 곤경에 처하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순간을 맞이하는 소설을 생각해 보는 것으로 어리광을 마무리한다. 세상에는 이런 인간도 있는 법이고, 잘 다듬으면 그 인간의 어떤 면은 소설이 된다. 


소설을 ‘제대로’ 읽지는 못해도 ‘끝까지’ 읽기는 한다. 읽은 것들이 잊히는 건 싫다. 그래서 난 해석을 전혀 담지 않은 감상을 써 놓기로 했다. 애초에 해석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처지이니 최선책인 셈이지만, 차선책인 것처럼 사기를 치고 있다. 해석에는 정답이 없다고들 하지만 평론을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운 뭔가는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훌륭한 글이 많다. 누가 정답 비슷한 뭔가를 써 놓으면 즐겁게 읽으면 그만이다. 단, 감상을 쓰기 전에는 아니다. 나의 첫 느낌이 사장되게 놔둘 순 없으니까.


소설을 읽을수록 더 그것을 진심으로 대하게 된다. 이건 나의 입장이고, 두 명의 문학평론가가 쓴 산문집을 읽게 됐으니 ‘소설’을 ‘문학’으로 바꿔서 감상을 남겨 둔다. 평생 문학 안에서 문학을 다루며 문학으로 문학을 고민한 사람들의 글에서 진한 진정성을 읽었다. 내 업(業) 때문에 했던 어떤 설문조사에서 사람들은 진정성을 ‘진짜’이면서 ‘진심’인 무언가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내가 읽은 문학평론가들의 글에 담긴 진정성 역시 사람들이 생각한 것과 같다. 그 진심은 진짜다. 진짜인 뭔가가 문학에는 있다. 아무래도 이제 나는 진심으로 그것들을 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


(2021.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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