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4.
외국 음악을 들을 때 가사는 중요한 선택 요인이 아니다. 어차피 잘 들리지도 않고 바로 이해되지도 않아서 가사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멜로디나 편곡이 괜찮으면 그냥 듣는다. 그래서 어떤 계기로 좀 자세히 들여다볼 일이 있으면, ‘이 노래가 이런 내용이었어?’ 하고 새로울 때도 있다. 몰랐던 가사와 내용을 알게 되면 음악이 더 좋게 들리기도 하고 이제껏 이런 음악을 좋다고 들어온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 음악을 들을 때는 가사도 신경 써서 듣는다. 자연스럽게 파악되니 내용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음악이 어지간히 좋으면 가사가 약간 이상해도 참고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대개 좋은 음악은 가사도 좋다. 가사가 엉망인 음악은 좋다고 생각되지 않으니까.
소설이나 영화에서 어떤 인물의 감정을 그 인물의 입을 통해 그대로 말하게 하는 건 좋지 않다. ‘나 지금 슬퍼’라고 말하게 하는 대신,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슬퍼서 어떤 행동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독자와 관객은 능동적으로 인물을 해석하고 이해하면서 그 세계로 빨려 들어갈 수 있다. 나는 노랫말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심정이나 생각을 일차원적으로 내뱉으면 그것들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죽어버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은 마음을, ‘죽을 만큼 보고 싶다’고 표현하는 건 아무래도 너무 성의가 없다. 정말? 하고 의심이 든다. 아마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하고 싶어서 그런 선택을 하는 거겠지만, 그리고 그런 게 사람들에게는 먹히는 모양이지만, 나는 못 듣는다. 닭살이 돋는다. 세상에 있는 가장 쉬운 단어를 고민 없이 편하게 선택해 버린 것이 아닌가. 너무 과장되거나 죽은 비유를 사용하는 경우도 그렇다. 총 맞은 것처럼 마음이 아프다는 그 가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화자는 실제로 총을 맞아 본 건가. 아마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는 직설적인 표현 대신 총에 맞은 것 같다는 비유법을 써서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려던 것인지 몰라도, 변함없이 일차원에 머무른다. 낯부끄러운 비유를 할 바에야 그냥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고 하는 게 차라리 낫다. 나 혼자 이런 엄격한 잣대를 백날 들이대 봤자 저런 노래들은 엄청나게 인기를 끌고 대중에게 사랑받는다. 뭐 그럼 그것대로 그만이다. 난 내 놀이터에서 혼자 놀고 있는 거다.
반대로 어떤 노랫말이 훌륭한지도 말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주관적이다. 나쁘다고 평가한 것과는 반대로, 감정이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들고, 숨어있는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노랫말. 그 의미를 알아채고 나면 마음에 어떤 움직임이 생기는 노랫말. 듣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노랫말. 그런 게 좋은 노랫말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그대 고른 숨을 들으며 행복했고
아마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그대 숨을 가쁘게 하고
이제 우린 친구야 내가 원하는 건 절대 이게 아닌데
화창한 날씨 덕에 기분은 나쁘지 않네
(날씨, 검정치마)
처음 이 노래를 들을 때 앞 두 줄을 듣고 나는 혀를 내둘렀다. 고른 숨과 가쁜 숨. 내 앞에서는 고르기만 한 상대의 숨소리를 들으며 화자가 느끼는 건 좌절과 열등감이다. 가쁜 숨소리는 성적인 연상도 되도록 중의적으로 쓰였다. 그러고도 날씨가 화창해서 기분은 괜찮다고 말한다. 절대 낙관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자조적으로 읊조리는 패배자의 감수성이다. ‘나는 너랑 사귀고 싶은데 너는 나를 친구로만 생각해서 마음이 씁쓸하다’고 직접적으로 노래해선 저런 심란함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다른 예다.
난 좋은 남자친구였어 여자한테 차여본 건 딱 한 번뿐
내가 먼저 차인 건 딱 한 번뿐
(벼락, 줄리아 하트)
화자는 갑자기 다른 남자가 좋아졌다고 변심해서 떠나간 여자친구에 대해 노래한다. 벼락같이 다가온 이별의 순간(여자친구는 다른 남자에게 벼락같이 빠져버린다)에 대해 노래하면서 마지막까지 이런 해명을 한다. 내가 먼저 차인 건 이번 한 번 뿐이라고. 이 사람한테는 그게 중요한 거다. 정말 지질하지 않은가. 이런 화자의 성격이 저 한마디에 담겨있어서 노래를 듣고 나면 이 남자에게서 여자가 마음이 멀어진 이유가 있겠거니 납득하게 된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남자의 억울함이 더 크게 와닿을 테니, 다양한 해석을 부르는, 역시 좋은 가사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알아 왠지는 몰라 그냥 알아
언젠가 너로 인해 많이 울게 될 거라는 걸 알아
궁금한 듯 나를 바라보는 널 보며
난 그런 생각을 했어
(언젠가 너로 인해, 가을방학)
이건 어떤가. 눈도 못 뜰 때 데려온 강아지를 키우다 어느 순간 화자는 깨닫는다. 시간의 속도가 달라서 개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리라는 걸. 그 때문에 많이 울게 될 거라는 걸. 둘 사이에는 다르게 흐르는 시간의 속도와 실존적인 거리가 있다. 그것을 뛰어넘어 함께 존재하는 시간 안에서 온기를 나눠 갖는 소중한 경험. 화자는 개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그것을 인식하고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나는 개를 키워본 적이 없는데도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뭉클하다. ‘나는 복실이가 죽으면 슬플 것 같아’라고 해선 끌어낼 수 없는 감동이다.
이런 게 좋은 가사라고 난 생각한다.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지만 전부 다 똑같다고 말할 수도 없다. 각자 자신과 잘 맞는 것을 즐기는 수밖에.
위에서 예로 든 줄리아 하트와 가을방학, 그리고 바비빌은 매우 훌륭한 음악을 하는 밴드들이다. 이 밴드들의 음악을 만들고 가사를 쓰는 사람은 정바비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음악을 정말 잘 만든다. 몇 번 듣기도 전에 귀에 감겨버리는 멜로디라인. 가장 알맞은 편곡. 누구나 겪는 일상에서 건져 올린 노랫말에는 아무나 할 수 없는 통찰이 담겨있다. 나는 오랜 시간 이 사람이 만든 음악을 즐겼다. 덕분에 김소월의 시 한 편(오르골, 줄리아 하트)을 외울 수도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사람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뉴스에 나와 나를 놀라게 했다. 교제 여성 성폭행 혐의다. 이 사건은 무혐의 발표됐지만 이어 또 다른 여성이 폭행 및 불법 촬영으로 고소했고, 이 사람이 찍은 영상도 확보했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사건은 조사 중일 테고 그 이후 뉴스는 보지 못했으므로 이 사람의 범죄 여부를 내가 판단할 순 없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나와는 멀리 있으므로 섣불리 파렴치한이니 뭐니 할 순 없다. 나는 이성적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충격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사람과 성범죄는 아무래도 연결해서 생각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이런 짓을?
그러고 보면 나는 순진한 기대 같은 걸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는 아름다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 작품과 작가를 간단하게 일치시켜 버린다. 그렇지 않은 예를 살면서 무수히 보면서도 좀처럼 그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작품은 작품으로 즐기면 그뿐, 그걸 만든 사람에 대해서는 궁금해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의도적으로 만든 이미지로 사적인 이득을 편취하고 공적인 피해를 입혔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품은 기대는 수용자 각자가 책임질 문제가 아닌가 싶은 거다. 그런 관점에서 내 실망은 내가 감당할 문제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환상과 기대를 품는다. 인간이 다양한 면을 가진 복잡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꾸 잊는다. 여전히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는 선한 면을, 그렇지 않다고 판단한 사람에게서는 그렇지 않은 면을 본다. 그래 놓고는 생각지 못한 모습을 발견하면 놀란다. 그 사람이? 그런데 이건 웃긴 생각이다. 한 인간에 대해 내가 뭘 알 수 있단 말인가. 자기도 자기를 모르는데. 그래서 누군가의 예상치 못한 모습을 만나게 돼도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런 면이 그 사람에게는 있는 거다. 내가 몰랐을 뿐.
정바비도 그렇다. 아름답고 따뜻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정바비가 있고, 성범죄에 연루된 정바비가 있다.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그런 짓을 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어' 하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도대체 어떤 게 당신의 진짜 모습이야?' 하고 묻는 건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니다. 아름다운 노랫말을 쓴 것도 (혐의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끔찍한 짓을 한 것도 모두 진짜 모습일 테니. 대중에게 드러나지 않던 면이 드러나게 되는 것뿐이다.
정바비가 만든 노래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 사람이 받는 혐의가 사실로 밝혀지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노래는 변하지 않는다. 그 노래를 만든 마음도 전부 가짜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그 노래들을 듣지 못할 것 같다. 그 노래가 진짜라는 건 알지만 아무래도 그런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만든 노래는 듣고 싶지 않다. 작품과 작가를 여전히 분리하지 못하는 건가.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닌 것도 같다. 사람의 마음은 복잡한 법이다. 실망은 내가 처리할 내 문제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어떻게 그런 노랫말을 쓰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하고 의아한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