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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름 Jul 13. 2021

작은 것들이 태어나 꼬물거리다가

계속해보겠습니다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내일모레면, 85년도, 내가 세 살, 누나가 다섯 살, 어머니가 서른 살, 아버지가 서른여섯 살이었던 때부터 살아왔던 아파트를 떠나 새로운 집으로 부모님이 이사한다. 만으로 삼십오 년을 채워 산 아파트다. 한 인간의 반평생 정도의 시간이다. 그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대통령은 전두환이었다. 나는 내 인생의 삼십팔 분의 삼십삼 만큼을 그 집에서 살았다.


내 나이는 그 아파트가 주변 반경 수 킬로미터 내에서 가장 높고 삐까뻔쩍했던 때의 아버지 나이보다도 많아졌다. 소회나 감회가 없을 리가 없다. 앞으로 살면서 문득문득 떠오를 거다. 우리 가족은 그곳에 살던 때의 얘기를 감초처럼 종종 하게 될 터이다. 그건 우리 가족에게만 재미있는 얘기일 거다. 


나는 이미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아파트에 살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을 떠올린다. 그것들은 대개 나에게만 재미있거나, 나에게만 슬픈 것들이다. 말과 글은 훌륭한 도구임을 알고 있지만, 아주 잠깐 동안 한없는 외로움이 나를 잠식했다가 풀어준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동안 그것들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나, ‘자기’를 인식한다. 무한한 우주에서 유일한 하나이자, 무한한 우주에서 유한한 하나일 뿐인 존재로서, 과잉되지도, 결핍되지도 않은 관념의 영역에서, 내부와 외부의 압력이 적당히 균형을 이룬 물리적 실체로서,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왜 이런 개똥 같은 존재론적 망상으로 가득한 허세를 부리고 있나. 

좀 더 황정은처럼 산뜻하고 무뚝뚝하지만 읽고 나면 감정이 일어나는 글을 쓸 순 없나.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가을 들판의 보리밭 같았다. 바람을 맞아 아주 잔잔하게 휩쓸렸다. 격렬한 건 없었다. 울컥한다거나 하는. 


읽은 지 불과 일주일 남짓인데, 어떻게 끝났었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좋았었지, 하는 기억만 남았다. 왓챠에 감상평을 이렇게 적어두었다. ‘작은 것들이 태어나 꼬물거리다가 삭아 없어진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가족은 지구에 태어나 가족으로 만났다. 나는 좋은 것들과 그보다 많은, 좋지 않은 것들을 물려받았다. 무엇보다도 증오를 키웠고, 그것을 누그러뜨렸다. 가족을 만들어 번식을 이어가라는 유전자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고 있어서, 앞으로 이 증오가 대물림될지는 미지수다. 계속해볼 일이다. 


그 집에 대한 나의 기억과 감정이 있고, 우리 누나의 기억과 감정이 있고, 어머니의, 아버지의 것들이 있다. 우리 각자에겐 다 다른 것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 가족의 것도 있다. 분명히 각자에게 있지만, 우리가 함께 가진 것들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 이외의 존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 인간에게 의미 있는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지구는 사라질 거다. 지구뿐만이 아니라 사라진다는 의미조차 사라질 거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한다. 그런데도, 가 아니라, 그래서, 우리는 계속하는 거라고, 계속해야 하는 거라고, 어떤 철학자는 말할 거다. 분명히. 


(2020.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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