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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름 Jun 21. 2021

두 팔 높이 들고 응원할 팀이 있다는 것은

피버피치 / 죽어도 선덜랜드

[에세이] 피버피치. 닉 혼비.

[넷플리스 시리즈] 죽어도 선덜랜드(SUNDERLAND ‘TIL I DIE)

*이 글에서 내가 좋아한다는 축구는 유럽 주요 리그 축구를 말한다. 안타깝게 나는 그 외의 축구에는 아직 별 흥미가 없다. 진정한 축구 매니아 같은 건 아니라는 말이다. 




축구는 내 인생에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축구를 보기 시작한 지 불과 2년도 되지 않았는데, 유명 선수들의 이적과 새로운 팀의 스쿼드 따위에 대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고, 주말 밤에 축구 중계를 해주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당한 것처럼 허탈하고 화가 난다. 축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지난 인생을 돌이켜 보면,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는 이 갑작스러운 변화가 놀랍다. 그런데 정말 갑작스러운 변화였나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니다.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매주 경기를 보기 시작했고, 선수들을 알게 됐고, 관중들의 환희와 좌절을 목격했다. 그렇게 서서히 나는 축구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무엇 때문에 축구가 재밌는지 생각해 본 적도 있다. 물론 생각을 깊이 한 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은 신통치 못하다. 공은 둥글다거나, 선수들의 움직임이 역동적이라거나, 그 엄연하고 자명한 거대한 자본의 시장판을 보는 게 재미있다거나, 이유는 다양하다. 그 모든 것들이 축구에 빠지는 요소이기도하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딱 하나만 골라보라 한다면(그 누구도 나에게 이런 것을 묻지 않아 슬프다), 난 “관중”을 꼽겠다. 


세계 여러 나라에는 미친 축구팬 들이 많다. 특히 영국의 축구팬은 유명하다. 훌리건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 정신 나간 인간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기도 했다. (이 대목에서 노래를 틀어야 한다. Embrace의 Hooligan이나 Rancid의 Hooligans. 전적으로 내 취향이다.) 훌리건은 축구팬인 것이 맞지만 모든 축구팬이 훌리건인 것은 아니다. 훌리건만큼 폭력적이지 않을 뿐이지 흘러 넘칠 정도의 열정을 지닌 축구팬들의 모습을 다양한 경로로 확인한다. 


1년간 매주 1회씩 38주에 걸쳐 진행되는 유럽 주요 리그 경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빅클럽이라 불리는 거대한 구단이나, 듣도 보도 못한 소도시의 작은 구단이나, 그 팀을 응원하는 팬들의 모습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경기장에 모인 관중들을 보면, 시합이 진행되는 두 시간 동안 그들이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는 걸 알 수 있다. 축구를 관람하는 팬들은 한없이 단순한 동작으로 그들의 심정을 드러낸다. 나는 그것을 목격하면서 점점 더 축구에 빠져들었다. 축구는 무척 단순하고 명쾌하다. 세상은 복잡하고 사람의 마음은 그것보다 더 복잡해서 단순하고 명쾌한 것에 점점 더 마음이 간다. 


축구팬이 되고 싶다면 두 가지 동작만 익히면 된다. 두 팔만 이용하면 된다. 표정은 부차적이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골을 넣었을 땐 두 손을 하늘 높이 올린다. 쭉 뻗어야 한다. 따로 생각할 필요도 없이 얼굴엔 환희와 기쁨이 넘치고 있을 거다. 사람에 따라서는 주먹 쥔 팔을 앞으로 뻗기도 하고, 동료와 손바닥을 부딪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마이너리티 클럽에 속하게 된다. 두 손을 하늘로 쭉 펼쳐야 메이저리티 클럽에 속할 수 있다. 박수를 치거나 옆 사람을 얼싸안는 것은 그다음 동작이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골을 넣을 절호의 기회를 놓쳤거나 골을 먹었을 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다. 어깨를 감싸 쥐거나, 옆 사람의 머리를 감싸 쥐면 마이너리티 클럽에 속하게 된다. 자신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탄식해야 한다. 화를 내거나 삿대질을 하며 욕을 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이 둘만 기억하면 된다. 두 팔을 뻗거나 머리를 감싸 쥐거나.


조금 과장하자면 나는 관중들의 그런 모습을 보기 위해 축구를 본다. 누가 시켜서도 아닌데, 사람들은 축구를 보면서 울거나 웃거나 화를 낸다. 그 한없이 솔직한 감정들이 약속한 것도 아닌데 똑같은 동작으로 표현된다. 그 단순함이 좋다.


축구에 미친(정확히는 특정 축구팀에) 한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읽다 보면, 축구가 스포츠 중 하나일 뿐이라는 말은 하기가 어렵다. 이제 나는 닉 혼비가 재밌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아스날에 미친 축구팬이라는 걸 안다. 그의 인생은 아스날로 인해 변했고, 성공했고, 망가졌다. 아스날의 역사는 닉 혼비 삶의 단면들이고, 그의 인생 자체가 아스날의 역사이기도 하다. 응원하는 팀이 없는 팬은 있을 수 없고, 축구팀은 팬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덜랜드는 2017년에 잉글랜드 1부 리그인 프리미어리그에서 2부 리그인 챔피언십으로 강등됐다. (유럽 주요 리그는 20팀으로 이루어진 1부 리그에서 매년 순위가 낮은 3팀은 하부 리그로 강등되고, 하부 리그의 3팀이 1부 리그로 승격되는 시스템이다.) 그러면서 다시 1부 리그로 올라가는 과정을 담겠다는 기획으로 다큐멘터리를 촬영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팀은 다큐를 촬영하는 1년 동안 끝없이 추락한다. 이 1년을 담은 것이 “죽어도 선덜랜드” 시즌1이다. 난 이 시리즈를 보면서 마(魔)가 끼었다는 말의 실체를 목격했다. 이미 몇 년 전에 끝난 경기를 보면서 제발 한 번만 이겨달라고 빌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선덜랜드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도시고, 선덜랜드 사람들에게 선덜랜드 축구팀은 단순히 지역 축구팀을 넘어서는 삶의 원동력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이 팀이 더 높은 리그로 올라가야 이 지역의 경제는 살아나고,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도 더 나은 현실이 길을 열어준다는 거다. 만약 축구팀으로 인해 지역민의 삶이 달라진다면 축구는 더 이상 그냥 축구가 아니게 된다. 매회 선덜랜드 팬들의 좌절한 얼굴을 보아도 괜찮으냐가 이 시리즈를 보기 전에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다. 단순히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기에는 다소 복잡한 심경이 들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큰 맘먹고 귀농한 젊은 부부가 몇 년째 쏟아지는 폭풍우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불가항력이 무기력으로 전환되는 발전소를 관광하는 기분이다. 시즌1의 마지막 화에서 이 팀은 2부 리그에서 한 단계 아래인 3부 리그로 강등된다. 다큐멘터리의 기획 의도는 완전히 어긋났다. 시즌2에서는 팬들의 더 슬픈 얼굴을 볼 수 있다. 


선덜랜드 팬들에게 선덜랜드 팀은 벗어던질 수 없는 운명이다. 분노하고 좌절할 순 있지만, 그 팀을 부정할 수는 없다.


스포츠 팬들에게는 응원할 팀이 필요하다. 자본이 스포츠 팀을 만든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 팀에 굳건한 팬이 생긴다. 스포츠 팀과 팬은 그렇게 서로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된다. 스포츠 팀과 팬은 필요불가결한 관계를 맺는다. 그 사이에 자본(구단주)은 가교 역할을 한다. 자본이 부족해 사라지는 스포츠 팀을 팬들의 힘만으로 다시 살릴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이 삼각관계를 조금은 다르게 보게 되었다. 이전에는 “스포츠 팀은 팬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만 생각했다. 이 생각은 “스포츠 팀=자본”이라는 도식에 기반했다. 하지만 자본은 대체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나니, 스포츠 팀과 팬이 맺는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응원하는 팀이 없어서 다행이기도 하지만 슬프기도 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스포츠 팀의 팬이 된다는 것은 걸어둔 만큼의 기대보다 더 큰 절망을 가져가게 될 수도 있는 야바위 판에 끼는 것과 같다. 삶의 골목에는 좌절이 도사리고 있고, 환희를 맛보기 위해서는 절망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인고의 시간을 버텨야만 한다. 그렇게 살아내다 보면 환희의 순간이 찾아온다. 나는 그 기쁨의 크기를 상상하지 못한다. 응원하는 팀이 없는 나에겐 절망도 없지만, 환희도 없다. 


(2020.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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