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라는 세계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나의 친애하는 조카가 이제 제법 소통이 될 만큼 성장해서 우리 가족에게 하루하루 더 큰 기쁨을 선사하고 있다. 아이가 있으면 집 안 공기가 달라진다. 어머니와 누나의 입버릇은 조카를 보며 그래도 네 덕분에 웃는다 하고 웃는 것이 되었다. 웃음은 가족을 건강하게 한다. 조카가 우리 가족을 건강하게 만든다.
가끔, 그것도 짧은 시간 동안 만나기 때문에 나는 대체로 기분 좋은 상태의 조카만 만난다. 그래서 나는 조카가 밉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자기 고집이 생기고 갑자기 떼를 쓰며 울어버리는 모습을 봐도 그저 뭔가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군 하고 미소 짓는다.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부모들은 나처럼 웃어버릴 수 없을 거다. 데려가서 일주일만 있어 보라는 농담 안에 담긴 일말의 진심이 전해져 온다. 끔찍이 사랑해도 가끔은 꼴도 보기 싫을 수도 있는 게 사람이다. 부모가 된다는 건 충동보다 훨씬 큰 사랑으로 인내와 포용의 한계를 넓혀가는 것이 아닐까?
인정한다. 나는 아이를 키워본 적 없는 속 편한 삼촌이라서 이런 얘기를 이렇게 쉽게 하고 앉아있다.
가만히 나의 친애하는 조카를 생각하다 보면 가슴이 저릿하고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저 아이가 커 가면서 만나게 될 세상이 저 아이의 몸과 마음에 새길 자잘한 생채기와 깊은 상처들을 생각하면, 그로 인해 저 아이가 짓게 될 슬픈 표정을 생각하면 그런 기분이 된다.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더 자주 섬찟 놀라고 저리게 아프겠는가. 딸이 어린이집에서 만난 남자아이 이야기만 해도 괜히 싫다는 친구들의 기분을 눈곱만큼 짐작해 볼 따름이다. 그 귀여운 질투는 걱정과 불안에 뿌리내리고 있다. 조카가 살아갈 날을 생각하다가 눈물이 날 것 같은 내 기분은 부모들의 걱정과 불안보다는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이다. 외부와 부딪쳐 가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상실하고야 말 순수를 그리워하는 쪽에 가깝다. 밝은 쪽으로 가면 피터팬을, 어두운 쪽으로 가면 오스카(양철북)를 만나게 되는 길이다.
나는 어른들의 걱정과 불안이 아이들을 숨 막히게 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내 아이가 없으므로 나의 바람은 보편적으로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향한다. 그래서 속 편하고 무책임하다. 어릴 때 영어 시킬 필요 없다고 학원은 안 보내는 게 좋다고, 쉽게 말해버린다. 나는 아이를 낳을 계획이 없으면서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하고 쉽게 가정하고 말해버린다. 아이 없는 어른이 모두 나처럼 무책임한 것은 아니다.
이 짧지만 밀도 높은 에세이집을 낸 작가도 아이가 없다. 작가는 어린이 독서교실을 운영하면서 만나 알게 된 어린이들과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어린이를 대하는 자신의 철학과 어린이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풀어놓는다. 어린이를 향한 깊은 존중심이 바탕을 이루고 있어서 읽는 사람도 절로 그런 존중심이 마음에 깔린다. 이 책을 읽은 후에 나는 처음 보는 어린이와 대화할 때 항상 존댓말을 쓰리라 결심했다. 어린이 요금을 적게 받는다고 해서 어린이가 ‘한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가끔 잊는 건 아닐까? 아직 ‘한 사람’ 몫을 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어린이를 대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인생에서 어린이와 관계를 맺었던 많은 순간을 떠올려 본다.
이제 나는 다시 나의 친애하는 조카를 생각한다. 조카는 머지않아 어린이가 되어 살아가게 된다. 어린이로 지내는 시간은 짧지만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어린 시절이 무의식에 남긴 발자국을 따라 걸어간다. 성인이 되어 그 길을 돌아보는 일이 끔찍하지 않아야 한다. 성인이 된 조카가 가끔 나를 마주칠 때, 어린 시절 자신을 ‘한 사람으로’ 존중했던 사람이라고 기억하면 좋겠다. 나는 속 편하게 무턱대고 어린 조카의 편이 되어 성인이 되기 전까지 마음을 다해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 걱정과 불안보다는 순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나를 그 편에 있게 한다.
(2021.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