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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름 Jun 17. 2021

싸움 끝에 가진 나

기생충 / 빌어먹을세상따위

[영화] 기생충

[넷플리스 시리즈] 빌어먹을 세상따위(THE END OF THE FxxxING WORLD)







수천수만 개의 양동이에 든 물을 일시에 쏟아붓는 것처럼 비가 온 주말이었다. 여기저기서 물난리가 났다.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었고, 재산을 잃었다. 나는 주말 동안 네 편의 영화와 넷플릭스 시리즈 두 개를 봤다. 공교롭게도 네 편의 영화 중 하나는 기생충이었다. 쏟아지는 비가 가난한 동네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장난스럽고 가벼워 보이기까지 하던 이 가족은 비에 젖은 후 웃음을 잃었다. 아들에게 있지도 않은 계획을 말하는 송강호의 얼굴은 비애(悲哀)에 젖어 있었다. 나는 이 영화를 세 번 보고 나서야 그 장면이 슬퍼졌다.


취직을 해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내 가난은 티가 나지 않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느냐를 말하는 건 아니다. 내 가난은 항상 나 자신에게 티를 냈다. 사회는 소외된 자들에게 최소한을 제공하기 위해 가난의 기준을 세워두었고 우리는 그것에 동의하지만, 사실 가난은 상대적으로 인식된다. 나는 세끼 밥을 굶은 적이 없고, 잘 곳이 없었던 적이 없다. 소풍도 가고 PC방도 가고 술도 마셨다. 그렇지만, 돈을 벌겠다고 전단지를 돌리는 등 아르바이트를 했고, 집에 부담이 될까 학원을 다니지 않았고, 문제집을 빌려 빈 종이에 답만 적어 맞춰보기도 했다. 학식은 가장 싼 것을 먹고, 방학마다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학비를 벌기 위해 대학을 2년 휴학했다. 그러면서도 여행도 하고 기타도 치고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나는 가난했을까.


그건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가난을 항상 의식했다. 돈을 의식한 게 아니다. 돈이 있어도 잘 쓰지 못한다. 돈이 없음을 두려워하는 거다. 가진 돈의 액수가 커지면 나아질 것 같았지만,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별 고민 없이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기도 한다. 가난은 티가 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가난한 것 같다.


얼마 전 방송에서 주식 투자로 유명한 기업의 대표가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부자란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 말에 꽤 크게 동의한다. 액수의 문제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 아니, 액수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그 대표는 액수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렇지만 누군가는 액수도 문제라고 생각할 거다.


온라인 공간에서 사람들은 쓸데없는 상상 놀이를 하는 경우가 있다. 충격적인 말들을 볼 때도 있는데, 일례로 얼마를 주면 똥을 먹을 수 있냐는 질문에는 10억에서 1억까지 경쟁하듯 가격을 낮추는 댓글이 달린다. 2억도 필요 없다. 1억이면 된다, 이거다. 상상의 세계라 자원은 한정되어 있지 않은데도, 가격은 경쟁하듯 줄어든다.


가난도 부도, 가진 돈의 액수가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렇다고 오로지 상대적인 것만도 아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세상을 판단하는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빌어먹을 세상 따위(THE END OF THE FxxxING WORLD)는 나를 고등학생 시절로 데리고 간다. 그때 가지고 있던 분노가 다시 떠오르진 않는다. 분노를 가지고 있었던 나의 어떤 상태가 기억난다. 누구든 붙어보자는 마음으로 거리를 걸었던 기억도 난다. 아직 살아서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한다.


자신이 언제 확실히 어른이 되었는지를 명확하게 떠올릴 수 있나.


어른이 된다는 표현은 확실히 재수 없다. 어른이 된다기보다는, 이제 더 이상 나는 어리지 않구나, 어릴 수 없구나를 깨닫는 때가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 온다. 사회의 제도가 알려주기도 하고(민증을 당당하게 내밀 때) 혼자서 뭔가를 판단하고 결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우리 각자에게는 지나온 시간이 있다.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있다. 남들과는 완전하게 다른 기억이다. 1초도 같은 시간은 없다. 완벽하게 개별적인 자신만의 1초 1초가 쌓여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 그 어떤 인간이 소중하지 않을 수 있나.


고유의 시간 속 어딘가에 세상과 처음으로 맞서고 싸웠던 기억이 있다. 치열했고, 격렬했다. 이 드라마 속 두 주인공처럼.


드라마 속 두 주인공은 철부지였다.(입술을 비벼대는 첫키스와 자기 집 소파에서 살인을 상상하는 그 어설픔) 하지만 시즌2의 마지막에 두 철부지는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고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두 사람이 그들의 부모처럼은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우리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세상과 싸우는 것 같았던 두 사람이 실은 자기 자신과도 싸우고 있었다는 걸, 제대로 살기 위해서 용기 있게 과거와 맞섰다는 걸 알게 된다. (넷플릭스 시리즈 아이 엠 낫 오케이도 청소년기의 우리 모습을 훌륭하게 그린다)


우리는 모두 세상과 자신과 싸운 후에 어른이 되었다. 퇴적된 시간이 우리 각자에게 고유의 정체성을 주었다. 우리는 치열한 싸움 끝에 자아를 쟁취했다. 세상 속의 상대적인 나와 오직 하나뿐인 절대적인 나를 인식하면서 가치관이 만들어졌다. 싸움 끝에 얻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매우 공고하다.


모두가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는 걸 잊지만 않는다면, 타인에게 상처를 덜 입힐 수도 있을 것 같다. 부끄럽게도 나는 종종 잊는다.


(20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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