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의 그림자
[소설] 百의 그림자. 황정은.
두꺼운 책으로 머리를 때리면 더 거대한 충격으로 뇌가 흔들린다.
두꺼운 책을 베면 목이 더 높이 올라가서 목디스크가 오기 쉽다.
두꺼운 책으로 벌레를 잡으면 확실하게 죽일 수 있다.
두꺼운 책에는 더 많은 종이가 쓰였기 때문에 더 많은 나무를 살해했다.
두꺼운 책이 좋지 않으면 슬프다.
그렇다. 단순히 책의 두께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거다. 책이 두껍다는 건 내용이 많다는 거다. 어떤 내용으로 채웠는지는 관계없이 내용이 많으면 그 안에 담긴 세계는 무겁다. 그래야만 한다. 좁고 깊거나 그게 아니면 얕더라도 넓어야 한다. 질량과 부피는 비례하는 거 아닌가.
양철북, 인간의 굴레, 죄와 벌로 머리를 맞아 보았는가. 두통이 밀려올 정도다.
두꺼운 책의 첫 장은 무겁다. 스스로에게 실망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얹힌 무게다.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썰어야 한다는 강박을 학습한 세대다.
두꺼운 책은 마지막 장도 무겁다. 얼른 덮어버리고 현실 세계로 가고 싶은데, 얼른 덮어지지가 않는다. 뭔가 이렇게 대충 덮고 다른 책을 펼치면 안 될 것 같다. 다 이해하지 못한 게 있는 것 같고, 아직 나에게 할 말이 더 남은 것 같고, 그 동네에서 더 서성거리고 싶은 마음도 든다. 어디에 감상도 그럴싸하게 써놓고 싶고, 언젠가 잊힐 걸 알기 때문에 그전에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싶다. 막상 하진 않는다. 시간은 흐른다. 충만했던 빛은 희미해지고, 얼룩만 남는다. 언제든 그 얼룩을 발견하면 충만했던 그때가 떠오른다. 어렴풋이 기분 좋았던 기억이 난다. 기억만 기억하게 되는 거다.
두꺼운 책을 끝까지 읽은 후에 후회한 적은 별로 없다. 나와 맞지 않는 책이었다면 끝까지 가기 전에 덮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물론 후회하게 될 거다. 기회비용은 주로 실패했을 때 계산하게 되는 법이니까.
기회비용을 줄이고 싶으면 얇은 책을 읽으면 된다. 얇은 책은 첫 장이 가볍다. (물론 가볍게 펼쳤다가 한 시간 넘도록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땐 과감하게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덮어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책이 다시 나에게 다가오는 때가 온다. 기다리면 된다.) 조금만 더 읽으면 끝난다는 생각에 조금 어려워도 기운이 난다. “자 남은 두께를 만져봐. 다 왔다고.”
자, 여기서 문제다. 얇은 책의 마지막 장의 무게는 어떨까?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 대개는 두꺼운 책에 비해 가볍다. 얇은 책도 물론 새로운 생각에 불을 붙이거나 마음을 움직인다. 감동의 크기는 책의 부피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지 못할 만큼 무겁게 마음을 짓누르지는 않는다. 책장을 덮고 이 세계를 빠져나가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대단히 두렵지는 않은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얇은 책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비교다. 그리고 책의 무게를 잰 것은 저울이 아니다. 일천한 나의 경험일 뿐.
좋은 기억이 남은 얇은 책은 다시 읽기에 부담이 없다.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 독학자를 여러 번 읽었다.
이 일기를 쓰며 ‘질량과 부피는 비례한다’는 문장을 무의식 중에 써놓고, 이 문장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검색했다. 무려 이과생으로 물리Ⅱ까지 배운(20년이 되긴 했지만) 보람이 전혀 없게도 완전히 엉터리 가정 하에 이 글을 썼음을 알게 됐다. 지식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질량과 부피는 비례하지 않는다. 물리 세계에는 ‘밀도’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 번 읽은 책은 뭔가를 묵직하게 남긴다. 그게 바로 밀도다.
(2020.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