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연재] 글로벌 설득
회의실의 공기가 멈추는 순간이 있다. 논리는 정교하고, 자료는 충분하다. 준비한 슬라이드를 모두 넘기며 막 설명을 마쳤을 때, 돌아온 것은 고요한 정적이다.
동료들은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내린다. 질문도, 반박도 없다. 그저 침묵이 흐른다.
문득 서늘한 직감이 스친다. '대화가 멈췄다.'
돌이켜보면 내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타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떠오른 질문을 붙잡고 있을 수 있기에.
“그래서, 이게 나의 세계(현실)에서 무슨 의미가 있지?”
우리는 설득을 위해 '어떻게 잘 말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논리를 다듬고 자료를 보강하고 구조를 정리한다. 이 모든 일은 분명 중요하다.
실제 대화에서 한 가지 일이 더 일어난다. 각자의 고민이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보는 일이다.
하나의 '강'을 떠 올려 보자. 나는 강 건너편 ‘목표의 땅’에 서 있고, 상대는 강 이편 ‘현실의 땅’에 서 있다. 나는 건너편에서 소리친다.
"올해 매출 목표가 110% 성장입니다.
이 프로젝트 반드시 완수해야 합니다."
"우리 조직의 비전을 위해
모두가 더 치열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중요한 메시지다. 하지만 상대에게 이 말은 강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아득한 외침에 가깝다. "어서 건너오라"는 재촉과 함께.
상대는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의 땅에서 강물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저기에 가는 게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지?"
"내 짐을 덜어줄까, 아니면 새로운 부담이 생길까?"
설득의 시작은 강 건너편에서 손짓하는 것을 멈추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상대가 서 있는 현실의 땅으로 조용히 건너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비로소 다리가 놓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다리를 지탱하는 재료는 ‘상대가 얻게 될 구체적인 이득’이다.
“매출 110%를 달성합시다”라는 외침 대신,
팀의 리소스를 고민하는 이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번 목표를 달성하면, 우리 팀이 오래 고민해 온 신규 인원 채용 예산의 우선순위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업무 효율과 안정을 중시하는 이에게 이렇게 들려줄 수 있다.
"이 프로젝트가 안착되면, 매달 반복되던 수기 보고서 작업이 자동화됩니다. 팀원들이 소모적인 업무 대신 더 가치 있는 기획에 시간을 쓸 수 있게 됩니다."
개인의 성과와 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에게는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여러 부서가 협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조직을 설득하고 움직여 보는 리더십의 경험이 쌓일 것입니다."
리스크와 안전을 우선으로 보는 이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지금 당장은 변화가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을 도입하면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데이터 오류와 보안 사고를 90% 이상 선제적으로 차단할 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팀의 안전망을 만드는 일입니다."
상대가 서 있는 현실에서 출발해, 상대가 원하는 이득을 재료로 다리를 놓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 다리를 건너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결국 설득은 그가 서 있는 땅에서 내 목표에 이르는 길을 그의 언어로 다시 번역하는 과정이다.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잠시 자료를 덮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지금 강 건너편에서 내 목표를 외치고 있는가?
아니면
상대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의 땅에서, 그가 원하는 의미와 이득을 재료로 다리를 놓기 시작했는가?
회의실에서 멈췄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려 본다.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니라, 건너갈 수 있는 다리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꺼이 친절한 번역가가 되어 상대의 세계로 건너갈 때, 멈췄던 대화는 비로소 흐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