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보고인데,
왜 반응이 다를까

[브런치 연재] 글로벌 설득

by 켈리황

높이 올리거나, 주파수를 맞추거나


처음 미국에서 일할 때였다.


나는 완벽한 자료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데이터를 정리하고, 숫자를 교차 검증하고, 예상 질문을 준비했다. 틀리지 않는 것이 전문성이라고 믿었다.


어느 글로벌 미팅에서 30여 장의 자료를 발표했다. 시장 점유율, 성장률, 경쟁사 비교, 리스크 요인. 슬라이드는 정돈되어 있었고 설명도 매끄러웠다.


발표가 끝난 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한 임원이 물었다.


“So, what do you recommend?”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나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자료 안에는 충분한 정보가 있었지만, 한 문장으로 정리된 방향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때 처음 생각했다. 나는 정보를 설명하고 있었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날 이후, ‘전략적으로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진: Unsplash의 Mago Brown


LEVEL 1

시야를 높이는 연습 (Helicopter View)


전략적 사고를 처음 배운 순간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질문을 조금 바꾸는 일이었다.


이 사안이 조직 전체의 방향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내가 CEO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영어에 Helicopter View라는 표현이 있다. 위에서 전체를 내려다보는 시야를 의미한다. 같은 데이터라도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재고가 15% 증가했습니다.” 이 문장은 사실을 전달한다.


하지만 한 단계 위에서 보면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이 수치는 수요 변화의 신호인가.
제품 전략을 다시 점검해야 할 시점인가.

정보가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말한다면, 관점은 “그래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Helicopter View를 통해 사고의 높이를 조금씩 바꾸기 시작하면서, 보고의 방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보를 정리하는 대신 그 의미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진: Unsplash의 Aditya Parikh


LEVEL 2

상대의 시야에 맞추기 (Audience Matching)


시간이 지나면서 또 하나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높이를 올리는 것만으로 대화가 항상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내용을 설명해도 상대에 따라 반응이 달랐다.


어떤 사람은 과정과 세부를 묻고,

어떤 사람은 협력과 영향 범위를 묻고,

어떤 사람은 단 한 가지 질문만 던졌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때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전략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시야를 높이는 것을 넘어 상대의 시야에 맞추는 일까지 포함된다는 것을.


view.jpg 사진: Unsplash의 Dorel Gnatiuc




같은 안건을 세 사람에게 설명해야 했던 적이 있다.


팀의 실무자, 다른 부서의 리더, 그리고 임원.


상황은 같았다. 재고가 예상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의 중심은 조금씩 달라졌다.


실무자와의 대화


“현재 재고가 약 15% 증가했습니다. 판매 속도가 예상보다 느렸고 생산 일정이 유지된 것이 원인입니다. 그래서 다음 달부터 생산량을 일부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실무자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였다. 원인, 과정, 실행 계획. Technical한 정보가 대화의 중심이 된다.


다른 부서 리더와의 대화


“재고 증가가 판매 속도와 생산 일정의 차이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생산 계획을 조정하면 물류팀과 마케팅 일정에도 영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관련 팀들과 조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설명의 중심이 달라진다. 누가 영향을 받고 어떤 협력이 필요한지. Human 요소가 더 크게 작동한다.


임원과의 대화


“현재 재고 증가는 수요 구조가 예상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신호로 보입니다. 제품 포트폴리오를 다시 점검할 시점일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원인보다 방향이다. 이 상황이 비즈니스 전략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Conceptual 관점이 대화를 이끈다.


이 경험을 지나며 경영학자 로버트 카츠가 설명한 세 가지 기술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mana.png (Created by Kelly Hwang)


이 세 가지는 어떤 기술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라기보다 대화의 초점을 이해하는 단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자리에서는 Technical이 중심이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Human의 맥락이 중요해진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Conceptual의 시야가 대화를 이끈다.


전략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상대의 시야에 맞게 그 비율을 조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회의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같은 보고를 했는데, 왜 반응은 이렇게 달랐을까.”


어떤 때는 내가 충분히 높은 곳에서 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때는 상대가 보고 있는 시야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전략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어떤 높이에서 누구의 시야에 맞춰 말할지를 선택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나는 높이를 올려야 할까, 아니면 주파수를 맞춰야 할까.
man window.jpg Norbert Kundrak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3625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