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연재] 글로벌 설득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GM이 화가 많이 났던데.”
미팅이 끝난 뒤 상사가 조심스럽게 건넨 말이었다.
전 세계 리더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를 좋게 봤던 General Manager(GM). 그에게 내 업무를 직접 발표할 기회가 주어진 것은 단순한 보고 이상의 의미였다. ‘상사의 상사’에게 나를 소개할 수 있는 드문 순간이었고, 나 역시 그 기회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준비에 적지 않은 시간을 들였다. 예상 질문을 정리하고 데이터를 다시 검토했으며, 슬라이드 구성도 여러 번 수정했다. 부족해 보이고 싶지 않았고, 맡은 일을 충분히 설명하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컸다.
발표 당일, GM의 사무실은 예상보다 편안했다. Ross MBA 출신이라는 공통점 덕분에 잠시 캠퍼스 이야기를 나누며 웃기도 했다. 긴장이 조금 풀렸고, '생각보다 괜찮겠는데'하는 안도감도 들었다.
그런데 몇 장을 넘기지 않았는데 GM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멈추기도 쉽지 않았다. 무거운 분위기로 설명이 약 40분간 이어졌다.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
그 말을 꺼냈을 때, 공기가 처음과 달라졌다는 걸 분명히 느꼈다.
이후 내가 회사를 떠날 때까지 약 2년 동안, GM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회복됐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공개적으로 문제 삼은 적은 없었지만, 대화의 온도나 반응 속도 같은 작은 신호에서 종종 '그날의 인상'이 남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번 형성된 인식이 이렇게 오래간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실감했다.
당시에는 단순히 발표를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준비가 부족했나, 영어 표현이 어색했나, 전달 방식이 문제였나 여러 이유를 떠올렸다. 그런데 이후 리더십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고 다양한 코칭 사례를 접하면서, 그날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됐다.
경영학자 Robert L. Katz는 관리자의 역량을 세 가지로 나눈다.
일을 정확히 수행하는 기술적 능력(Technical Skills)
사람과 관계 속에서 영향력을 만드는 인간관계 기술(Human Skills)
조직 전체 맥락에서 방향과 의미를 연결하는 개념적 기술(Conceptual Skills)
그리고 조직 레벨이 올라갈수록 기술적 능력보다 개념적 기술의 비중이 커진다고 설명한다.
그 프레임으로 그 날을 다시 보면, 두 가지가 또렷해진다.
첫째, 나는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데이터도, 과정도, 디테일도 빠짐없이 설명했다. 그런데 GM이 궁금했던 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래서 무엇을 봐야 하느냐’였을 가능성이 크다. 방향과 해석이 먼저였는데, 나는 배경 설명으로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둘째, 내 시야는 기능과 역할 중심에 머물러 있었다. 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했고, GM은 그것이 조직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듣고 싶었을지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서로 다른 시야에서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셈이다.
당시에는 그 차이를 잘 몰랐다.
그 경험 이후 중요한 발표나 보고를 준비할 때면,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가장 높은 레벨의 사람은 무엇을 먼저 알고 싶을까?”
이 질문을 기준으로 메시지를 정리하면 몇 가지 변화가 생긴다.
말의 양은 줄어든다. 대신 방향이 먼저 보인다. 설명이 아니라 대화가 된다. 그리고 상대의 표정을 읽을 여유가 조금 생긴다.
예전에는 많이 설명하면 설득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안다.
어쩌면 설득은 더 많이 말하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가 보고 싶어 하는 방향을 먼저 비춰 주는 과정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발표를 준비할 때마다 종종 그 GM의 표정을 떠올린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묻는다.
“지금 나는 설명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방향을 보여주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