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로 가방을 보내며
여행은 늘 설렌다. 일상을 벗어난다는 말이 주는 설렘은 일상이 단조로운 사람일수록 더 크게 느껴지지 않을까. 단조로운 일상만큼 우리의 짐 가방은 단출했다. 여름철 옷은 부피가 작기도 하거니와 2박 3일의 짧은 여행에 필요한 짐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우리 둘의 옷가지와 세면도구는 작은 백팩 하나에 충분히 다 들어갔다.
하지만 백팩 하나가 전부라고 해도 짐은 말 그대로 짐스럽다. 기차 여행은 다 좋은데 자동차 여행보다 짐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는 단점이 있다. 호텔 체크인이 오후 3시인데 호텔에 짐을 풀고 여행을 시작하려면 하루를 온전히 쓰지 못하고, 그렇다고 아침 일찍 출발해서 2박 3일용 짐가방을 어찌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 메고 다니는 건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이쯤 되면 누가 기차역에서 호텔로 짐을 좀 옮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은 우리만 하는 게 아닐 터. 그런데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자신이 느낀 불편을 사업의 기회로 삼은 사람이 있었다. 역에서 호텔로 짐을 옮겨주는 업체, 짐캐리zimcarry의 창업자였다.
중학생 아이와 세상 속 다양한 삶의 형태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야기해 보기 위해 떠난 여행이니만큼 이 좋은 주제를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짐캐리 홈페이지에서 백팩 운송비 만 원을 결제하고 예약한 뒤, 나는 곧장 짐캐리 창업자 인터뷰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부산 맛집 검색 같은 건 내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 오로지 애와 나눌 이야깃거리의 얼개를 짜느라 바쁜 엄마의 모습이었다.
짐캐리 창업자의 인터뷰 기사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데일리투머로우Daily Tomorrow의 조현주 기자가 쓴 '짐 없는 홀가분한 여행을 위한 그의 심박한 도전'이라는 기사 내용이 아주 알차고 좋았다. 특히 이 기사에는 짐캐리 창업자의 학창 시절 이야기가 나와서 아이와 함께 읽어보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부산 토박이인 짐캐리 대표는 수능을 망치고 재수를 하고 싶었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부산외대에 마지못해 입학했다고 한다. 아직 수능 같은 건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여기고 있는 중학생을 키우고 있지만 (아직 하고 싶어 할지 아닐지 알 수 없는) 아이의 재수를 나 역시 허락해 줄 수 없을 것 같아 수능 점수와 상관없이 성공을 이루어낸 그의 사례가 아이에게 영감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하지 않던 대학에 입학한 그는 1년간 댄스 동아리에만 빠져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자신이 대학 실패를 영원한 패배로 여기며 그 생각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심기일전하게 된다. 기사에는 "한쪽 눈으로 보는 게 전부라고 믿은 게 잘못이었습니다"라는 표현이 있었다. 아이에게 이 말이 무슨 뜻인 것 같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수능 점수로 이끌어낼 수 있는 미래만 생각했고, 다른 쪽으로는 생각을 못했다는 뜻"이라고 대답했다.
수능 점수로 이끌어낼 수 있는 미래란 어떤 미래일까. 전문직이나 대기업 취업 등을 말하는 것일까. 전체 일자리 중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대기업 일자리 비율은 2021년 기준 13.9%이다. 이는 OECD 32국 중 최하위로 전체 평균(32.2%)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대기업 일자리 비율 14% 'OECD 최하위', 조선일보, 2024.2.28.) 이렇게나 적은 비율의 자리를 차지한 이들의 삶을 평균으로 여기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러니 청년들은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를 찾기가 어렵고, 취업 준비생 자녀 뒷바라지로 은퇴하지 못하거나 재취업을 해야 하는 노년 인구는 늘어난다. 고만고만한 형편의 나는 60대에 재취업 자리를 알아보게 될 확률이 높다. 다만 내가 두려운 것은 나의 60대 재취업 이유가 취업 준비생 자녀 뒷바라지로 인한 것이 되는 상황이다.
60대가 된 내가 너무나도 절박하게 재취업 자리를 알아보고 다니는 사태를 막으려면, 아이와 나는 각자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 이를 위해 나뿐만 아니라 아이 역시 자신이 지금 보내는 시간이 어떻게 미래와 연결되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경험의 종류와 질이 완전히 다른 10대와 40대가 이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느냐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아이는 중고등학생들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라는 말을 일삼으며 나에게 세븐틴 멤버들의 이름이나 빨리 외우라고 종용한다. 그것도 활동명과 본명 모두 말이다. 버논, 에스쿱스, 조슈아, 호시... 본명은 고사하고 멤버 13명의 활동명을 모두 외우는 일만 해도 이번 생에 가능할까 싶다. 뭔 이름이 이렇게 어려운지. 관심이 없으니 더욱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이가 내 관심사를 어렵게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관심사를 가진 10대와 40대의 이번 여행은 그저 해운대에 발 한번 담그고 오는 여행이 아니다. 일상을 벗어난 곳에서 나누는 새로운 주제의 대화를 통해 아이의 시선이 조금 더 넓어지길 바라는 목적이 있는 여행이다. 그 출발점에 부산역에서 해운대 호텔로 짐을 옮겨주는 업체, 짐캐리가 있었다. 그리고 짐캐리의 대표는 그의 인터뷰에서 나를 대신해 아이에게 말해주기라도 하듯, 지혜의 원천은 책이라며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성공한 사람들은 어쩜 이렇게 하나 같이 독서의 힘을 강조하는 건지.
독서로 힘을 키운 창업자가 만든 짐캐리는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 가방을 맡기기 위해 줄을 서있던 우리 앞으로 다양한 외국어가 들려왔다. 짐캐리 부산역점에 가방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돌아서는 중학생은 독서의 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는 부산역을 나서며 중고서적이 가득한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