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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명 Dec 12. 2023

OOTD 하나까지 완전 냥이답지

근데 이제 겨울에만 입어주는...

꼭 고양이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이라도 SNS에서 귀여운 옷을 입고 있거나 모자, 케이프 같은 것들을 입고 있는 고양이를 본 일이 한 번쯤은 있을 거다. 나도 여명이를 키우기 전에 종종 그런 사진이나 영상들을 봤고, 귀여워서 몸서리치는 한편 고양이들이 옷을 좋아한다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었다. 여명이를 임보하게 되면서 입양 홍보 사진을 찍을 때도 다른 고양이들처럼 예쁜 케이프나 모자, 옷 같은 걸 좀 걸쳐서 찍어줘야 하나 고민했었다.

모든 고양이가 옷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지 않은 고양이가 조금 더 많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건 여명이한테 뭔가를 입히려고 시도한 순간부터였다. 여명이와 함께 살기 시작한 지 100일쯤 됐을 때 딴에는 축하하는 의미랍시고 나비넥타이와 동생이 손수 만든 고깔과 닭가슴살 간식을 준비했다. 나비넥타이를 한 여명이가 얼마나 귀여울지 동생이랑 아침부터 설렜었는데, 결과부터 얘기하면 닭가슴살을 제외한 모든 선물은 다 거부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나비넥타이를 채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여명이 표정을 보는 순간 내가 방금 채운 게 넥타이였는지 죄인들한테 씌우던 칼이었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걸 당장 풀지 않으면 옷소매나 손등 중 하나는 물어뜯겠다는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어서 번개같이 풀어줬다. 다른 고양이들은 케이프도 잘하고 있던데...하며 의아했지만, 이게 목걸이 스타일이라서 안 맞나 보다 하며 가벼이 넘겼다. 다음에는 케이프 스타일로 한번 사보겠다고 다짐하면서.

다음으로 입혔던 게 마침 케이프 스타일이긴 했는데,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여명이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케이프 스타일이라고 포장하긴 했지만, 여명이가 입고(혹은 쓰고) 있었던 건 중성화 수술 후에 동생이 만들어 준 행주 넥카라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여러 넥카라를 전전하다가 여명이가 제일 마음 편히 쓰고 있었던 게 바로 이 행주 넥카라기는 했는데, 이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세상을 향한 울분과 노여움 같은 것들이 느껴져서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비넥타이에 이어 나름 신경 써서 만든 행주 넥카라까지 모두 여명이를 노엽게 만들어서 당분간 아무것도 씌우지 않기로 했다.

여명이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집사 자매는 기억력이 썩 좋지 않았다. 생활용품점에 갔다가 반려동물용 공룡 모자를 발견하고 동생과 나는 홀린 듯이 집어 들었다. 지금까지 목에 뭘 채워서 싫어했을지도 모른다며, 머리에 쓰는 건 의외로 좋아할 수도 있지 않냐며 우리는 두근두근하며 모자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

우리가 부스럭거리며 꺼낸 게 당연히 간식이라고 생각했던 여명이는 모자를 보는 순간 또 하늘이 무너진 표정이 되었다. 설상가상 여명이는 분명히 머리가 작은 고양이라고 생각했는데 모자가 살짝 끼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반려동물용이냐며, 햄스터들 쓰라고 만들어 놓은 거냐며 동생이 분통을 터뜨렸고, 여명이는 그보다 다섯 배쯤 더 열이 받은 상태였다.

당장 벗겨주지 않으면 오늘 피를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진을 조금만 더 (한 500장쯤) 찍은 다음에 모자를 벗겨줬다. 한 번만 더 써보면 좀 익숙하지 않을까 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으나 어림없었다. 모자에 손을 대는 순간부터 여명이는 척수반사급으로 경계를 시작했다.

결국 공룡 모자는 그날 같이 사 왔던 바나나 쿠션에 씌워놨고 여명이는 그제야 만족했다. 바나나 쿠션의 이름은 그날부터 거북선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여명이가 조금 오래 견뎌주는 옷을 드디어 발견했다.

원피스 같아 보이는 이 옷을 여명이는 제법 오래 입고 있었다. 입고 제법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하고 밥도 먹고 놀이도 해서 얘가 사실은 이런 디자인을 좋아했나 싶었다.

사실 이 옷은 동생이 우리 집에서 자고 갈 때 입는 잠옷의 상의다. 동생이랑 커플룩이라서 마음에 든 건지, 동생이 옷을 입혀놓고 박수를 쉬지 않고 쳐줘서 그런지 여명이는 이 옷을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 그 장면을 보던 나는 문득 여명이가 사실 사람의 옷을 좋아하는 건가 싶었다.

내 옷을 입혀보고 나서야 사람의 옷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동생 옷을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표정이 저렇게 살벌해서 얼른 벗겨주려고 했더니 또 벗는 건 싫었는지 한참 저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고양이 마음...

사람 옷과 고양이 소품을 몇 번 걸쳐본 여명이는 어느 크리스마스에 드디어 옷을 제대로 입고 있게 되었다.

저 산타 옷은 사실 모자까지 세트였는데 모자는 거부했다. 이쯤 되면 여명이는 목 위로 뭔가 걸치는 게 싫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모자까지 씌워보려고 한참 노력했지만 너무 완강하게 싫은 내색을 해서 결국 포기했다.

모자를 포기해 준 누나들에게 여명이가 나름 모델 워킹을 보여줘서 서로 만족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저 옷은 얌전히 입어줄 것 같아서 크리스마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목 위로 뭘 하는 걸 싫어하는 여명이한테 나는 정말 다양한 소품을 시도해 봤다. 그중에서 여명이가 가장 질색하는 건 안경이었다.

살짝 한번 얹어만 보자고 애걸복걸했는데 씨알도 안 먹혔다. 지금까지 했던 어떤 것들보다 격렬하게 거부해서 안경은 다시는 시도하지 않기로 했다. 거의 록페스티벌에 온 수준으로 머리를 흔들어대서 사진으로 남기지는 못했지만, 안경 얹은 여명이는 제법 귀여웠다.

여명이가 그럭저럭 잘 견뎌준 옷은 왕자님 의상이었다. 다른 옷이며 소품은 다 시큰둥하더니 왕자님 옷에는 거부반응이 덜해서 살짝 열받았다. 자기도 눈이 있다고 멋있는 건 아는 모양이라며 내가 투덜투덜했더니 입어줘도 난리냐는 느낌으로 왕관을 벗어던지기는 했다.

평소라면 금방 벗기라고 난리난리했을 텐데 이 옷도 입고 제법 편하게 쉬었다. 그렇게나 질색팔색하더니 이제 점점 옷에 익숙해지는 건가 싶어서 신기했다. 사실 옷이 아니라 집요하게 입히려 드는 집사를 포기하게 만들려면 한 번은 입어줘야 된다는 걸 체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올 겨울, 나는 여명이가 제법 좋아하며 입는 옷을 드디어 발견했다. SNS에서 볼 때마다 여명이도 입히고 싶어 했던 아이템을 사 왔는데, 여명이도 생각보다 좋아해서 감동했다.

바로 김장조끼! 옷 자체를 정말 좋아했다기 보다도 날이 갑자기 영하로 떨어졌던 그 주간에 사 와서 여명이가 더 반겼던 것 같기도 하다. 입으면 보들보들하고 따뜻해서 그랬는지 여명이는 이 옷을 입고 잠도 편히 잤다.

특히 환기 중에 바깥 구경을 할 때는 입고 있는 게 따뜻한지 먼저 물고 오기도 했다. 처음으로 여명이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해서 너무 좋긴 하지만, 하루종일 그루밍하려면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요즘은 환기할 때만 잠깐씩 입혀주고 있다. 그리고 올 겨울에는 여명이가 목에 두르고도 언짢아하지 않는 아이템도 발견했다.

간식을 여러 개 사고 사은품으로 받은 털목도리인데, 제법 마음에 드는 눈치다. 이것도 벗겠다고 난리 칠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둘러줬는데, 아무렇지 않게 놀이도 하고 거실도 돌아다녀서 신기했다. 그냥 저런 보들보들한 촉감을 좋아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두 개를 같이 입혔더니 귀엽긴 한데 뭔가 할머니 보고 싶어지는 색 조합이었다. 동생한테 보여줬더니 웬일로 잘 입고 있냐며 신기해하는 한편, 지금 당장 배추 절이러 가야 할 것 같다는 평을 했다.

그러더니 이런 사진을 만들어서 보내줬는데, 여명이가 너무 자연스럽게 어울려서 웃겼다. 여명이가 입어왔던 혹은 걸쳐왔던 무언가를 정리하며, 여명이가 옷에 기대하는 건 오직 보온효과뿐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무척 성공적이었던 김장조끼와 털목도리를 떠올리며 앞으로도 뭔가를 입혀보고 싶으면 겨울에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고마해라...(험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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