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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명 Nov 27. 2023

고양이는 사람 차별 안 하지

단지 편애를 할 뿐

나는 길거리 캐스팅으로 집고양이가 된 여명이가 그래도 제법 용맹한 고양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봐야 두 달 정도긴 했지만 사람이 제법 많이 다니는 골목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지간한 일에는 수염도 움찔하지 않는, 그런 배포가 큰 고양이일 거라고 어림짐작했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명이는 세상 둘도 없는 쫄보였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길에 살았던 두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극내향형 집사와 함께 살아서 다른 사람을 볼 일이 많지 않아서인지 여명이는 다른 사람의 소리만 들려도 긴장하는 편이다.

우리 집에 왜 오셨죠?

여명이가 세상에서 좋아하는 인간은 딱 둘, 같이 살고 있는 나와 자주 놀러 오는 내 동생이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 집에 놀러 와도 여명이 정면 얼굴을 못 보고 돌아갈 가능성이 무척 높다. 그래서 여명이를 예뻐해주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특히 용돈을 모아 고양이 장난감을 사가지고 놀러 온 어린 조카들이 구석에 숨어있는 여명이 꼬리만 구경하다가 아쉬워하며 집에 돌아갔을 때는 정말 안타까웠다. 이 어린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 집에 가냐는 여명이의 눈빛과 꼬리만 보이는 저 고양이는 도대체 언제 행거 밖으로 나오냐는 조카들의 탄식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결국 조카들이 선물해 준 장난감을 신나게 가지고 노는 여명이 영상을 보내주는 것으로 그날은 마무리가 되었다.

장난감은 이렇게 좋아하면서...

나와 동생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공평하게 불편해하는 여명이가 요즘 살짝 마음을 열기 시작한 사람이 있다. 가끔 집에 놀러 오시는 우리 아빠가 그 주인공인데, 마음을 열었다기보다 덜 불편해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어릴 때 큰 개한테 쫓긴 뒤로 평생 동물 자체를 살짝 무서워하시는 아빠에게 고양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물을 무서워하는 아빠와 사람을 불편해하는 여명이가 한 공간에 있어도 될까 고민스러웠는데 생각보다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제법 편하게 (대치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서로 안보는 척하며 대치중

거실에서 서로를 의식하면서 의식하지 않는 척하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둘에게는 미안하지만 보는 사람한테는 약간 웃음 지뢰다. 그래도 딸이 키우는 고양이니까 관심을 조금 가져볼까 하며 최소 1미터 밖에서 장난감을 흔드는 아빠도 볼만하지만, 멀리서 흔들리는 장난감에 관심은 있어도 숨숨집 밖으로 나올 엄두는 안나는 여명이가 머리만 쭉 빼고 있는 모습도 만만치 않게 웃긴다. 거실에서 한참 그러고 있으면 둘 중 하나는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를 할 법도 한데 안전거리는 영 좁아지지 않는다. 그래도 한 때 아빠가 집에 있으면 방 밖으로 안 나오던 여명이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기는 하다.

손만 보이는 아빠와 귀만 보이는 여명이

나는 여명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나라고 생각하며 지내왔는데 요즘 들어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집에 들어올 때와 동생이 놀러 올 때 반기는 정도가 심각하게 다르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평소에 외출했다가 내가 집에 돌아오면 여명이는 느릿느릿 방묘문 앞까지 나를 반기러 나오기는 한다. 날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방묘문을 못 열 정도로 열렬하게 반기지는 않고 그냥 집에 들어온 내 다리에 머리를 비비는 정도로 반긴다. 가끔 내가 아주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날은 부부젤라가 문 앞에 앉아있는 느낌이다. 이이이이... 하면서 노여움에 소리도 못 내고 뒷목부터 잡을 것 같은 대감님 같이 째려보다가 단전의 힘을 모아서 고래고래, 야옹도 아니고 야아아아!!!에 가깝게 소리를 지르는 걸 보면 기가 차긴 하지만 석고대죄를 안 할 수가 없다.

반기는 시늉은 해준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 놀러 오는 동생이 오는 날은 상황이 다르다. 어디에서 뭘 하고 있든 간에 도어록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나면 빛의 속도로 호다닥 뛰어나가서 방묘문에 거의 코를 박고 대기한다. 그러다가 현관에 동생이 들어서면 반가워서 몸부림을 친다. 동생이 방묘문을 못 열 정도로 막 머리를 비비면서 반기다가, 겨우겨우 동생이 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오면 걸려 넘어질 정도로 진로방해를 하면서 다리에 꼬리를 감고 아주 난리가 난다. 동생은 동생대로 혀가 반토막 나서 그런 여명이를 한참 예뻐해 주다가 그제야 내 안부를 묻는다. 둘이 그러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지난주에도 만나놓고 이 유난이라고? 하면서 나 혼자 어리둥절해진다.

최소 5분은 반기고 나서 들여보내준다

동생이 놀러 오면 그때부터 나는 집에서 거의 투명인간이다. 일주일에 한 번 보는 동생을 왜 저렇게 좋아하나 싶다가도, 동생이 여명이 간식이며 장난감을 살뜰하게 챙기고 둘 다 지쳐서 낮잠을 자야 할 만큼 격렬하게 놀아주는 걸 보고 있으면 좋아할 수밖에 없겠다고 끄덕끄덕하게 된다. 동생의 지독한 여명이 사랑도, 여명이의 한결같은 동생 편애도 오래오래 이어지면 좋겠다. 그리고 둘이 신나게 놀 때 가끔은 나도 좀 끼워주면 좋겠다.

그건 생각을 좀 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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