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스타트업 레고라가 증명한 '당연한 것을 잘 하는' 경쟁력
런던을 기반으로 20VC라는 팟캐스트 미디어 회사와 20VC Fund라는 벤처 펀드를 운용하는 해리 스테빙스(Harry Stebbings)는 실리콘밸리와 비교해 유럽의 벤처캐피탈 환경을 비판하는 글을 종종 올리곤 합니다. 속도도 느리고 숫자쟁이들이 대부분이라 스타트업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진다는 것이 핵심이죠.
실리콘밸리와 비교해 유럽의 벤처 신을 비판하는 이러한 내러티브는 한국과 실리콘밸리의 비교에서도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는 레퍼토리입니다.
한국에서도 흔히 "실리콘밸리에 비해 한국은 벤처캐피털의 투자 속도가 느리고 보수적", "국내 시장 한계 때문에 글로벌 유니콘이 나오기 어렵다" 등의 불만은 공청회에서도 늘 언급되는 수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VC 업계는 서로 친분만 쌓고 경쟁이 덜하다는 지적이나, 대기업이 스타트업을 하청업체 보듯 대하는 관행 등도 문제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요컨대 유럽이든 한국이든, 외부 환경 때문에 혁신이 더디다는 비판의 톤은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럽의 상황은 한국 벤처 생태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에서, 최근 유럽에서 나타나는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 진단 속에서도 최근 유럽에서는 AI 어플리케이션 분야에서 성공 사례가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스웨덴에서 시작한 Lovable(러버블)과 Legora(레고라)가 그 주인공입니다. 유럽 전체가 AI 스타트업 붐을 맞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스톡홀름 기반의 이 두 기업은 단기간에 놀라운 성장을 이루며 글로벌 시장이 주목하는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습니다.
러버블은 불과 2년 전 창업된 스톡홀름 출신 AI 스타트업으로, 올해 7월 유럽 사상 최대 규모의 시리즈 A 투자 유치에 성공했습니다. 액셀(Accel)이 주도한 2억 달러 규모 투자로 기업가치가 18억 달러(약 2조 원)에 달하면서, 회사는 일약 유니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기업가치를 두 배 늘려 추가 펀딩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공동창업자 겸 CEO인 안톤 오시카(Anton Osika)는 "유럽에서 스타트업을 한다는 건 하드 모드 게임을 하는 느낌"이라고 농담할 만큼 환경의 어려움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이뤄낸 기록적인 성과에 자부심을 보였습니다. 러버블이 내건 모토는 "AI 바이브 코더(vibe coder)", 즉 아이디어의 '느낌'만 말하면 AI가 알아서 앱과 웹사이트를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러버블의 제품은 사람의 평범한 문장 지시를 몇 분 만에 작동하는 소프트웨어로 바꿔주는 AI 빌더 툴입니다.
"우리의 미션은 모든 사람이 (코딩 없이) 만들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오시카 CEO의 말처럼, 코딩을 못 하는 대다수 99%의 비개발자들을 위한 시장을 공략한 것이죠. 누구나 쉽게 자신만의 앱을 만들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큰 비전이 투자자와 사용자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불과 2년 만에 폭발적인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레고라는 2023년 스웨덴에서 탄생한 법률 AI 스타트업으로, 법률업계에 특화된 AI 협업 워크스페이스를 만들고 있습니다. 프로게이머 출신 20대 초반 창업가가 아무것도 모르는 법률 시장에 뛰어들어 도전하는 모험을 감행했지만, 와이콤비네이터 출신이라는 글로벌 네트워크와 탁월한 기술력으로 빠르게 신뢰를 쌓았습니다.
레고라는 "모든 법률 전문가가 신뢰할 수 있는 AI를 갖추도록 돕겠다"는 미션 아래, 초기부터 변호사와 엔지니어로 이루어진 팀을 구성하고 법조계 최고 권위 로펌과 파트너십을 맺는 등 남다른 행보를 보였습니다. 그 결과 창업 2년 만에 전 세계 20개국 250여 개 로펌을 고객으로 확보했고, 올해 5월에는 아이코닉(Iconiq)과 제너럴캐탈리스트 등의 유수 투자자로부터 시리즈 B 8천만 달러 투자를 유치하며 기업가치 6억7천만 달러를 인정받았습니다.
미국의 경쟁사 하비(Harvey)와 자주 비교되는 레고라는 "단순한 포인트 솔루션이 아닌, 법률 업무 전반을 돕는 넓은 범위의 AI 에이전트 접근법"으로 승부해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고 CEO 맥스 준스트란드(Max Junestrand)는 강조합니다.
러버블과 레고라 모두 출발은 유럽의 작은 시장이었지만 처음부터 글로벌 무대를 지향하며 독보적인 가치를 증명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AI 열풍 속에서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등장했지만, 그중에서도 레고라의 성장 궤적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변호사 경력이 전무한 20대 초반 게이머 출신 창업자 맥스 준스트란드가 어떻게 법률 AI 서비스를 성공시킬 수 있었는지, 그의 전략은 의외로 AI와는 크게 상관없는, 고객 중심, 제품 중심, 그리고 속도 중심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맥스가 법률 AI 서비스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모함에 가까운 고객 밀착 전략이었습니다. 2023년 여름, 그는 AI를 활용한 법률 서비스를 제품으로 정하고 스웨덴 최대 로펌인 만하이머 스바르틀링(Mannheimer Swartling)의 대표 파트너와 미팅을 잡았습니다. 상대는 과거 "AI는 지능적이기보다 인위적이다"라고 공개 발언했던 AI 회의론자였죠.
맥스의 접근법은 정공법이었습니다:
저는 법률을 모르고 당신은 AI를 모르지만, AI는 분명 중요한 변화가 될 것이고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솔직한 제안 덕분에 맥스와 팀은 로펌의 창문도 없는 작은 회의실에 프로젝트 팀이라는 명목으로 6개월간 상주하며 변보사들의 일상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오후 5시가 되면 에어컨이 꺼지는 불편한 환경이었지만, 매일 점심시간마다 노트북을 들고 식당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변호사들에게 데모를 보여주며 피드백을 구했죠.
이런 밀착 관찰을 통해 구체적인 데이터를 확보했습니다. 변호사들이 하루 평균 2.7시간을 문서 검색에 소모한다는 것, 가장 빈번한 업무가 판례 검색(47%), 계약서 검토(31%), 법률 초안 작성(22%) 순이라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그렇게 등장한 첫 번째 제품은 놀랍도록 단순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로펌을 위해 디자인된 ChatGPT에 자체 문서와 스웨덴 법률에 대한 더 나은 RAG를 결합한 수준이었죠. 하지만 그 당시로서는 충분했고, 매주 최고 수준이 되기 위한 기준이 높아져갔습니다.
맥스가 보여준 것은 '미국이냐 유럽이냐'는 고민 자체가 잘못된 프레임이라는 점입니다. 2024년 겨울 와이콤비네이터 배치에 조기 합격한 후, 그가 구사한 팀 분할 전략은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는 모범 사례였습니다.
스웨덴 법인을 델라웨어로 플립하는 데 3개월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맥스는 매우 이례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YC 투자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4명의 엔지니어를 먼저 고용한 것입니다.
세계가 정말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우리도 그래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맥스는 미국을 오가며 상업화와 펀딩에 집중하고, 나머지 4명의 팀원은 스웨덴에서 고객 관리를 담당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나누었습니다. 맥스는 실제로 와이콤비네이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유럽 고객 대상 영업에 쏟았기 때문입니다.
맥스는 (밤중인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고) 링라이트를 노트북에 설치하고 새벽 1시부터 오전 10시까지 5-6일 연속으로 유럽과의 세일즈 콜을 진행했다고 회고합니다. 가끔은 너무 힘들어서 와이콤비네이터도 접고 스톡홀름으로 돌아갈 고민을 하기도 했다고 하죠.
하지만 이 듀얼 전략이 효과적이었습니다. 와이콤비네이터의 대부분의 회사가 3개월의 프로그램 기간 동안 제품 개발에 집중하지만 레고라는 스웨덴에서 제품을 개발하면서 곧바로 고객 확보에 나서는 실시간 영업 전략 덕분에 배치 기간 중 유례없는 매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파격적인 결정은 시리즈A 투자 직후에 나왔습니다. 첫 번째 이사회에서 맥스는 투자자들을 향해 놀라운 선언을 했습니다:
앞으로 4개월간 신규 영업을 하지 않겠습니다.
투자자들은 어리둥절했지만, 맥스는 확신에 찬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고객에게 우리의 제품을 소개할 기회는 단 한 번 밖에 없습니다. 특히 변호사들에게는 말이죠. 만약 변호사가 들어와서 쿼리를 실행했는데 작동하지 않으면, 그들은 떠나버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재활성화시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제품이 완벽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개발자들과는 달리 변호사들의 기대치는 완전히 다릅니다. 개발자들은 "어딘가에서 시작해서 함께 여정을 떠나는" 아이디어를 좋아하지만, 변호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결정은 적중했습니다. 맥스는 팀에게 "하루에 수천 명의 사용자가 플랫폼에 접속해도 아무것도 망가지지 않는 지점"에 도달하라고 지시했고, 실제로 그 목표를 달성한 것이죠.
레고라의 사례가 전하는 교훈은 명확합니다. AI 시대에도 창업의 기본 원칙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객에서 시작해야 하고 제품에 집중해야 하며, 자신들이 잘 아는 커뮤니티에서 시작해 확장해야 합니다. 다만 AI 덕분에 이러한 반복(iteration) 사이클 자체가 줄어들었고, 과거에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던 피드백 사이클을 가져가면서 월 단위로 개발하던 것을 일 단위로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AI의 등장으로 오히려 모든 기업들, 특히나 스타트업들은 더 치열한 경쟁이 요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실리콘밸리에서 최근 들어 996(오전 9시-오후 9시, 주 6일 근무)이 주목받을까요? 자동화가 되니까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 속도가 경쟁력이 되는 세상에서는 오히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그래놀라(Granola)의 서비스를 그대로 베껴와 서비스하는 국내의 한 스타트업은 사실 AI 시대의 성장 방식이 아니라, 서비스의 기본 원칙도 망각한 행보일 뿐입니다. 이렇게 단순히 모방한 서비스가 글로벌은 커녕 한국에서도 생명력을 얻을지 의문입니다. AI 시대는 쉬운 것을 편하게 만드는 시대가 아닙니다. 예전에는 감히 엄두내지 못했던 더욱 어려운 과업을 달성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레고라가 보여준 건 바로 이런 접근법입니다. AI를 활용해 편의성을 추구한 게 아니라, AI를 통해 기존에 불가능했던 수준의 고객 밀착과 제품 완성도를 추구했죠. 창업팀은 무려 6개월 동안 로펌 현장에 상주하며 변호사들의 실제 업무 과정을 관찰했고, 시리즈 A 투자 이후에도 무리한 확장보다는 제품 완성도와 신뢰 확보에 집중했습니다. 이러한 집요한 실행은 AI 시대에도 여전히 본질은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해결하는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결국 AI 시대의 진정한 승자는 AI를 활용해 남의 아이디어를 빨리 배끼는 요행이 아니라, 기술을 도구로 삼아 근본적 가치 창출에 매달리는 팀이라는 교훈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AI 시대, 더 작게 시작해 더 멀리 가는 창업의 기술”
빨리 가는 회사가 아닌, 단단한 회사를 만드는 미니멀리스트 창업가의 놀라운 전략
사업을 시작하고 키워나가는 일의 대부분은 사실 그리 신나는 일은 아니다. 시작에서 성공에 이르는 여정은 오랜 시간 힘겹게 걸어야 하는 고행에 가깝다.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고,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작은 성취들이 쌓이다 보면,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 뿌듯함과 자부심이 점점 내면에 쌓이는 것을 느낄수 있다.
『미니멀리스트 창업가』
AI 시대의 창업은 더 이상 투자자들에게 선택받는 게임이 아니다. 고객에게 바로 도달할 수 있는 채널, 반복 작업을 줄이는 도구, 빠르게 실험하고 검증할 수 있는 환경이 모두 갖춰졌다. 이제 중요한 건 외부 자원이 아니라, 창업자의 철학과 선택이다.
『미니멀리스트 창업가』는 자신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작고 단단한 비즈니스를 만들고 싶은 모든 창업가에게 새로운 기준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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