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5일 밤, 호주 퀸즐랜드 골드코스트에 엄청난 스톰이 닥쳤다. 시속 100킬로가 넘는 강풍을 동반한 토네에도 급의 스톰이 골드코스트를 강타했다. 사람들은 다들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떠 있었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스톰으로 밤새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다음날의 처참한 광경은 내가 호주에 이민을 온 후 처음 본 광경이었다. 한 아름이 훌쩍 넘는 굵기의 나무들이 나무젓가락 부러지듯 부러져 쓰러져 있었고, 전깃줄도 끊기고 늘어진 곳이 많았다. 지붕이 폭격 맞은 것처럼 뚫리고 무너진 집도 있고, 펜스는 다 쓰러져 버렸다.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날은 한 여름의 정점이라 매일 최고 기온이 40도 가까워 습하고 무더웠지만 25일부터 정전이 되어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단 전기가 들어오는 도서관을 집 삼아 지내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의 냉장고 냉동실은 다행히 많은 음식이 들어있진 않았다. 며칠 째 냉장고 털이를 진행 중이다가 정전이 되었기에 버릴 음식이 그다지 많진 않았다. 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연휴라 냉장고를 꽉 채워두었기에 냉장고의 그 많은 음식들을 다 버려야 하는 처지였다. 커뮤니티 센터에는 냉장고에서 녹아 쓸 수 없는 음식을 버릴 쓰레기 통들까지 마련되었다. 아침 9시부터 도서관이 문을 여는 저녁 7시까지는 어떻게든 더위를 피해 볼 수 있었지만 집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행하는 마음으로 더위와 싸워야 했다. 밤이 되어도 식지 않는 더위의 열기에 잠을 제대로 청할 수도 없었다.
전기 복구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지만 이틀이 되어도 사흘이 되어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곳이 시골 어느 외딴 지역도 아니고 몇 만 가구가 사는 도시임에도 전기복구가 늦어지는 상황이 되니 마음 한편에서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였으면 있을 수나 있는 일인가. 아마 만 하루를 넘기지 않고 모든 전기를 복구해 놓았을 텐데, 이 느려 빠진 호주에서 나는 완전히 개고생이구나.'
낮 최고 기온이 43도를 찍자 밀려드는 무더위로 내 짜증의 온도 역시 올라가고 있었고, 더는 이렇게 못살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페이스북 동네 그룹에서도 누군가가 불만을 터트리는 글을 올렸다.
'도대체 에너젝스(ENERGEX, 한국으로 치면 한국전력공사)에서는 뭐 하는 거야. 지금 전기 없이 산지 사흘째인데 도대체 언제 전기가 들어오는 거냐고!!!'
그러자 그 글에는 댓글과 그 글을 잇는 다른 글들이 쏟아져 올라왔다.
이쯤에서 당신은 어떤 상상을 하고 있는가?
'그래 맞아. 나도 도대체 에너젝스가 뭐하는지 모르겠네.' 혹은, '세금 받아서 정부는 뭐 하니. 이렇게 전기 없이 언제까지 방치할 거야. 대책을 마련하라고!'라는 동조의 댓글과 글들이 난무했을까?
예상과는 달리 이곳 호주 사람들은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 불만 가득 조급한 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순식간에 폭주한 댓글의 대부분은 이랬다.
'네가 지금 이렇게 불평할 때가 아니야. 이 더운 날씨에 에너젝스 직원들이 복구 작업하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 생각한다면 그들에게 오히려 감사함을 표현해야지.'
'너의 상황만 생각하지 말고 저 위에 탬보린 마운튼에 사는 피해 입은 사람들을 생각해 봐. 거기는 여기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 우리가 불평할 때가 아니라 그곳 사람들을 도와야 할 때라고!'
'에너젝스 직원들 너무 감사해서 난 전기가 복구되는 대로 우리 식당에 오면 에너젝스 전 직원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할 생각이야. 아직 전기가 들어오진 않았지만 그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고, 전기는 곧 들어올 테니 좀 여유를 갖고 기다려보자, '
'네가 힘든 건 알겠지만, 우린 지금 모두가 힘들어. 힘들 때일수록 더 서로를 도울 방법을 생각해야지, 불평불만하는 건 어른답지 못한 것 같다. 네 자녀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줄 부모가 되길 바라.'
이런 댓글들과 글들이 순식간에 올라왔고 불평의 글을 쓴 그 누군가는 아마 고개를 들기도 부끄러웠을 것 같았다. 나 역시 한국과 비교하며 불평의 생각을 가졌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다행히 에너젝스에서 열심히 복구작업을 한 결과 우리 동네는 정전 5일째 되던 자정 즈음에 불이 들어왔고 곳곳에서 탄성을 지르며 기뻐하는 소리가 밤의 무더운 공기 속에 터져 나왔다.
물론 5일 동안 전기 없이 지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나름 캠핑 기분을 낼 수 있기도 했고, 무더위와 사투한 경력이 생겨, 웬만한 더위는 견딜 힘이 생겼다. 하지만 내가 가장 크게 얻을 수 있었던 건 힘든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호주인들이 나타내준 사람에 대한 사랑과 감사,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따뜻한 마음, 어려운 상황에서도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는 여유로운 태도, 그런 값진 것들을 몸소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에 전기 없이 산 5일이 나에겐 아름다운 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
우리 동네는 겨우 5일이었지만 다른 인근 지역은 2주, 3주 동안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고생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불평 없이 그저 감사함으로 그 모든 시간을 기다려준 그들에게 정말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고 싶다. 호주가 한국에 비해 느려서 싫은 적이 참 많았는데, 호주가 느려도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