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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Apr 24. 2024

20년 이민자가 한국에 다시 살게 된 이유

한국을 떠나 해외 생활을 한 지 20년이 넘었다. 이젠 국적도 바뀌어 한국 사람도 아니고, 난 한국 입장에서 철저히 외국인이다. 한국에 돌아올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노년에 죽기 전에 묻힐 곳으로나 한국을 찾게 될 줄 알았다. 코로나 때를 제외하곤 가족들을 만나러 2년마다 나가곤 했으니 한국이 영 낯선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20여 년의 이민 생활 끝에 한국에 살러 나온, 외국인으로서 보는 한국은 영 낯설다.


남편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민을 간 케이스라, 자신의 삶의 반 이상을 타지에서 산 사람이다. 자신이 원해서 이민을 간 것도 아니고, 자신이 원해서 해외에 머물게 된 경우가 아니니 남편은 늘 마음속에 한국을 그리며 살아왔다. 하지만 가정을 꾸리고 난 후에는 더욱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어려워졌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 직장 문제 등 여러 가지 생활의 걸림돌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2년에 한 번씩 고국을 방문해 가족들을 만나는 것으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로 했다.


사람의 일이란 계획처럼 되지 않는 것이고, 예기치 못한 일들이 불시에 일어나기 마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을 나갈 때마다 시아버지께서 조금씩 언어 사용이 불편해 보이기 시작했다.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셔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때가 늘어나시고, 자꾸 무언가를 잊어버리시곤 했다.

가족들의 권유로 병원을 찾은 아버님은 치매 판정을 받으셨다.


가족들에게 아버님의 치매 판정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단순히 노화로 인해 말이 느려지시고 기억력이 감퇴하신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치매 때문인지는 다들 생각지 못했다. 매일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몸에 좋다는 음식도 잘 챙겨 드시고, 늘 밝고 즐겁게 생활하시는 아버님이 치매 판정을 받으시리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아버님의 병세는 초기에 천천히 진행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상황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거울 속 자신을 못 알아보실 때도 있었고, 감정 조절 능력을 잃고 격분하시는 일도 종종 있게 되었다. 호주에서 화상 통화를 할 때도 아버님은 말씀이 없으시고 웃기만 하셨다. 아들의 얼굴을 보아도 말로 표현하는 법을 잃어버리셔서 그저 웃기만 하셨다. 아버님이 말없이 웃기만 하실 때마다 나 역시 마음이 아팠다. 말을 잃어버리시고 웃음으로 모든 걸 대치해야만 하는 아버님을 보며 남편은 괴로워했다.


나 역시 아버님의 병환이 걱정되었지만 남편이 아버님이 계신 한국에 나가서 몇 년 살자고 하는 제안을 했을 때,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편의 말을 듣고 제일 먼저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따랐다. 큰 아들은 독립을 해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지만 혼자 호주에 남겨두기엔 아직 어린 스무 살의 나이였다. 둘째는 제법 컸다지만, 아직 어리광이 가득한 중학교 2학년이었다. 우린 호주에서 자리를 잡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고, 둘째 녀석은 한창 예민한 사춘기를 겪고 있었기에 그런 제안을 하는 남편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속 좁은 나에겐 남편의 말이 부모를 위해서 자녀들은 희생하자는 말로 들려 속상했다. 적어도 둘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호주에 있으면 안 되겠냐는 말에 남편은 아버님께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말로 대답했다.


아버님의 병세가 얼마만큼의 속도로 악화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더 이상 자식마저 알아보지 못할 상황이 되면 남편이 아들로서 아버님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없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남편은 그래도 자식을 알아보실 수 있으실 때 단 몇 년 간만이라도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곁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는 남편에게 한국으로 들어와 사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직 한창 돈을 벌어야 할 나이이고, 한국에 가서 어쩌면 직장을 구하기 조차 힘든 상황이 될 수 있을 텐데, 오로지 부모님을 위해 한국을 나간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호주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교육을 받은, 아직 어린 둘째를 한국에 데리고 가 적응시킬 일도, 아직 마음 여린 첫째를 혼자 호주에 남겨두고 가야 하는 것도 가장으로서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남편은 나에게 부모님을 위해 단 몇 년만이라도 한국에 나가 살다 오자는 제안을 했다.


쉽게 하는 제안이 아닌 줄은 알지만, 그런 제안을 쉽게 따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이 남편의 마음에 평생 한으로 남을 것 같아 어렵사리 남편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나도 희생해야 할 부면이 있고, 첫째나 둘째 녀석도 힘든 고충을 겪어야 하겠지만, 우린 가장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단 몇 년이라도 아들을 알아보실 수 있는 아버님께 아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기 위해 20년 동안 떠나 있던 한국에서 다시 살아 보기로 했다.


<사진: 문경새재가 신기한 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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