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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에 나타난 반갑고, 가엾은 거미

by 나무향기

호주에 살 때는 참 많은 벌레와 한 집에 같이 살았다. 독이 있다는 레드백 스파이더부터, 다양한 개미들과, 다양한 바퀴들과, 다양한 거미들이 식구인 양 자주 들락거려서 벌레와 곤충에 무뎌졌다. 깔끔 떠는 사람들은 1-2년에 한 번씩 페스트 컨트롤을 하지만, 내가 살았던 퀸즐랜드는 페스트 컨트롤 한다고 벌레가 통제되는 그런 곳이 아니라, 일찌감치 공생하기로 마음먹었고, 가끔 비가 많이 와서 개미 군단들이 떼거지로 이사를 하는 때면 내가 개미집에 사는 건지, 개미가 내 집에 사는 건지 헷갈려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벌레들과 동고동락하였는데, 한국에 오고서는 단 한 번도 우리 아파트에는 벌레가 출몰하지 않았다. 물론 여름이면 방충망에 모기가 붙어있기는 하지만, 그런 날벌레들 말고, 정말 우리 집에 살고 있는 벌레는 보지를 못했다. 명색이 '시'도 아니고 '읍'이라 주변에 밭과 논이 많은데도, 아파트에서는 동고동락하는 벌레는 볼 수 없었다. 뭔가 어색했다. 혹시 내가 벌레도 못 살 그런 시멘트 박스에서 말라가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다. 김치찌개만 끓이면 온 동네 파리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오던 소동은 호주에서만 있었던 일이 되어버렸다. 김치찌개가 아니고 고등어구이를 해도 파리 한 마리 보이질 않는다.


내가 과연 생물이 살만한 곳에 살고 있는 건가?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욕실에서 통통한 거미 한 마리가 나타났다. 놈은 어떻게 시멘트 틈을 타고 들어 왔는지 시멘트 갈라진 틈을 들락날락하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영 생물이 못 살 그런 곳에 살고 있지는 않구나 하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그 거미가 불쌍해졌다. 동지들은 푸른 잎이나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거미줄을 늘어뜨리며 매달려 있을 때, 저 녀석은 시멘트 틈사이나 들락거리고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게 되었다. 멋들어지게 거미집을 짓고, 아침이면 이슬이 맺히고, 배 고플 때 즘에는 벌레 한 마리가 매달려 배를 채우는 팔자 좋은 거미가 되질 못하고, 거미줄도 제대로 짓지 못할 이런 팍팍한 아파트로 기어들어온 거미가 가엾어졌다.


그러다가 정말 가엾은 게 거미인지, 그런 거미를 바라보며 가엾어하는 나인지 혼란스러워졌다. 푸르른 잔디밭을 아침이면 밟고, 낮이면 햇빛을 쐬고, 저녁이면 호수의 지는 노을을 바라보던 호주에서의 나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팍팍한 닭장 같은 아파트 한 칸에 살면서 잔디는커녕 엘리베이터만 오르락내리락하며 왠지 모를 삶에 숨 가빠진 지금의 내가 꼭 시멘트 사이를 들락거리다 눈에 띈 거미 같다.


손으로 무엇이든 해야만 무언가가 이루어지던 호주와 달리, 클릭하나면 아무리 늦은 저녁에도 다음날 새벽에 내가 원하는 모든 물건들이 도착해 버리는 한국에 살면서도 여유가 없고, 늘 피곤하다.


시멘트 속에서 쪼그라들어 말라가는 거미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욕실에 나타난 거미가 참 반가웠는데, 반가움은 사라지고, 가엾음만 남았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편안함을 누리고 있다는 착각 속에, 온갖 편리함을 두른 시멘트 박스 한켠에서 말라가고 있는 내가 가엾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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