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주변사람에게 어떤 연예인이나 동물을 닮았다, 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것이다.
나도 종종 그런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대부분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머리 컬러가 유난히 까맣고, 아주 마르고 키가 큰 여자.
마른 건 복이라고 했나.
하지만 난 어렸을 적부터 마른게 싫었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의 인사는 언제나 "너 살빠졌어?" 였고,
"더 빠지면 죽어." 이게 나의 냉소적인 대답이었다.
지겹게 살찌라는 말을 들었고, 어쩜 이렇게 말랐냐는 질문에 넌덜머리가 났다.
가족들은 어떤 체질이냐며 불쑥 물어오는 이도 있었고, 신체사이즈를 자세히 알아내는 사람도 있었다.
마른 사람에게 던지는 이 개인적인 질문들은 결코 예의에 어긋난 것이 아닌 듯, '부럽다'는 기분나쁜 칭찬을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이런 질문에 구체적이고 구구절절한 대답을 해야한다는 건 정말 지치는 일이었다.
새로이 만나는 사람들과 해야하는 대화속에 빠지지 않는 주제였으니,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 하겠지만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배부른 소리가 아님을 말하고 싶다.
나는 말랐다는 주제로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꼭 덧붙이는 말이 있다.
"말랐는데, 체력은 좋아."
어렸을 때 부터 하던 말이다.
나는 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 잔병치레가 별로 없는 체질이다. 한 번 쓰러져 본적도 없다.
넘어져도 뼈가 부러지는 일도 없었고, 응급실에 가본적도 없었다.
마른데도 체력이 좋다는 것은 젓가락 출신인 나의 또다른 자부심이었다.
그러니 친구들은 내가 승무원이 되어을 때,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정말 말랐네요! 일이 힘들지 않은가요!" 하고 걱정했지만
나는 밤을 새도 끄떡이 없었다.
비행기 안에서 누구보다 팔딱거리며 움직였고, 호텔에서는 쿨쿨 잘 잤으니까.(머리만 대면)
20시간이 넘는 비행을 끝내고 한국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신사동 가로수길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나가기도 했다. 거의 30시간을 뜬눈으로 보내며 술을 마시고, 자유시간을 보냈다. 쉬는날 하루가 아까워 퇴근하자마자 놀러나간 것이였다. 적어도 20대 까지는... 거의 늘 ...그게 가능했다.
20대, 체력이 그렇게 좋다던 나는 운동극혐녀 였다.
운동을 하면 근육이 아프고, 아픈데 대체 왜 운동을 하냐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피곤해지고, 돈도 시간도 낭비인데...아니 어쩌면 병원에 다녀야 할지도 모르는데 대체 왜???
꼭 운동을 하라, 던 승무원 선배들과 사무장님들의 조언은 내게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20대에는 운동을 한 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헬스장 근처엔 가본적도 없었고
헬스장에 시간과 돈을 헌납하는 사람들에 대해 속으로 한심한 놈이라고 여겼다.
그런 운동없이도 한 평생 마른몸으로 최상의 체력을 유지해 살았으니 그리 생각하는게 당연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서른 둘 즈음
하루하루 체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첫 번째 식사서비스를 마치고 잠시 승무원좌석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을 때
갑자기 목부터 허리까지 빳빳해지고 무릎은 뻐근해졌다.
스트레칭을 아무리 해도 나아지질 않았고, 숨을 쉬는데도 크게 쉬어지지 않았다.
승무원들의 업무는 비록 호흡이 길지는 않지만 순간적인 에너지를 짧은 시간안에 폭발시키듯 뿜어야 한다.
비행기에 올라 준비과정을 거쳐 승객의 탑승에 이어 안전업무를 마치고, 이륙할 때의 그 긴장의 시간을 지나
벨트사인이 꺼지자마자 휘몰아치는 2시간 이상의 서비스 업무는
있는 고통도 다 잊을 수 밖에 없는 강도높은 과정이다. 피를 토하는 것처럼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그 시간안에 토하듯 뱉어내고, 엄청난 집중력으로 앞만보는 경주마처럼 미친듯이 달려야 한다.
그 시간들이 끝나고 나서 잠시의 휴식이 생길 때가 되어서야 나는 알았다.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
지금 이 일은 내 삶의 끝 부분을 깎아 현재 이 짧은 순간위에 켜켜이 쌓아올리는 중이라는 걸.
이 기분을 처음 느꼈을 때 나는 애써 모른척 했다. 하지만 수명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버틸 수 없을만큼 턱 끝까지 숨이차고 체력이 바닥났을 때가 되어서야, (서른이 되고도 이 년이 흘렀을 때) 나는 운동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대로는 몇 년 못한다, 라는 결론이었다.
이미 선배들이 진즉 경험해보고 미리 알려주었던 조언을 이제서야 통감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 체력이 좋았던 건 그저 이십대의 치기어린 자부심이라는 걸 인정하며
그제서야 나는 운동학원 문을 두드렸다.
헬스장과 필라테스 샵, 마주보고 있는 두 학원을 오가며 상담받고
그나마 덜 괴로울 것 같은 필라테스 샵으로 발길을 옮겼다.
'거봐, 운동하지 말랬지? 운동하니까 너 다리아프고 팔아프고 잠오고! 소용 없다니까.
운동은 건강 해치는거라니까?'
20대의 내가 운동하는 친구에게 핀잔을 주던 때가 문득 스쳐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