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살아지다사라지다 Mar 10. 2023

주먹보다 말이 더 아플 때가 많다

기억력이 좋은 것도 내 잘못인가요

나는 운동과는 아주 거리가 먼 몸뚱이를 가졌다.

왜 인지 모르겠지만 체육시간에 피구를 하면 선생님이 나를 나무 밑 그늘로 안내했다.

수영 수업을 할 때는 돌고래 떼 같은 릴레이 대형에서 열외 되어 몸만 물에 담그고 왔다.

5명의 달리기 시합에서 4등을 하는 날은 잔치를 해야 했다.




약해 보이는 딸을 강하게 키우고 싶었던 건지

엄마는 자주 나를 때렸다.


큰 키에 체격이 좋은 엄마는 여자 농구부에 발탁되었다가 반칙을 너무 많이 해서 쫓겨났다.

상당히 저돌적인 성향의 딸을 어떻게든 수습하고 싶었던 할아버지는

딸에게 피아노 공부를 시켰다.

엄마는 그래서 피아노 선생님이 되었지만

아이들이 너무 무섭다고 항의해서 그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30대의 엄마는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어서

콘크리트 벽에 맨 주먹을 치며 단련을 했다.


"엄마. 왜 그렇게 벽을 치는 거야?"

"이래야 주먹이 더 단단해지거든. 주먹을 쥘 때는 말이야, 엄지를 안으로 말아 넣어야 해.

봐봐. 이렇게 손가락이 일렬로 돼야지 힘이 딱! 어? 이렇게 돌처럼 단단하지?

너 같은 솜주먹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냐. 어휴 지 아비 닮아 약해 빠진 년."


아빠는 실제로 굉장히 왜소하고 약했다. 도무지 둘이 왜 만나서 결혼까지 했는지 모를 일이다.

아빠가 정장을 입으면 엄마는 사람이 옷을 입은 게 아니라, 옷이 사람을 입었다고 놀렸다.

걸어 다니는 옷걸이, 쇠꼬챙이,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놈 등으로 불렸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화가 난 엄마가 아빠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잡아 허공에 띄우는 것을 본 후

성인이 되면 꼭 해외 난민이 되던 군대를 가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길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아빠를 닮은 딸이라는 이유로 맞았다.

엄마의 주먹에 맞으면 몸에 멍이 들었다.

멍이란 참으로 다채로운 색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뛰다 넘어져서 무릎에 생긴 멍은 그저 단순했는데

사람에게 맞은 멍이란 참 오묘했다.

진한 보라색, 연 보라색, 황갈색, 노란색, 푸른색 등

과학 책에서 본 태양계의 행성을 한 폭의 수채화로 그려 넣은 듯했다.


처음엔 진한 색이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구름이 흐르듯 색상이 바뀐다.

짠 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서서히 잔상을 남기며 이별한다.

지구가 자전하는 만큼 내 몸에 새겨진 행성은 다른 우주로 이동했다.

미성년인 나는 어찌할 도리 없이 불현듯 또 나를 잠식할 행성에 숨죽여 운다.



몸에 생긴 상처는 치료가 된다.

그런데 말로 맞은 상처는 가슴에 오래 남는다.

내장 기관에도 멍이 들까? 눈으로 볼 순 없지만 아마 그럴 것 같다.

망각이라는 축복으로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도 하지만

같은 곳을 또 맞으면 왠지 더 아프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하는 욕은 쉽게 잊을 수 있는데

가장 가까운 가족이 하는 말은 굉장히 아픈 비수가 된다.

무심코 던지는 말이 돌부리가 되고, 칼이 되고, 못이 되어 콕콕 박힌다.


"엄마가 나 어릴 때 뭐라고 했는지 다 기억해. 엄말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악마라고 했지.

고작 초등학생 애한테 말이야. 전국팔도에 있는 욕은 다 끌어다가 나에게 줬어."


"나도 그땐 어렸잖아. 철이 없었잖아. 너는 잘 해준 건 기억 안 하고, 그런 것만 기억하니?

365일 중에 65일을 때렸다 치면, 300일은 너를 사랑하지 않은 거니?"


너무도 당당한 그녀에 모습에 나는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닫았다.

내 가슴속에는 외치고 싶은 말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응. 그건 사랑하지 않은 거야.'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두 번째 남자친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