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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wer Series Feb 07. 2024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올바르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약간 영화 자체가 채도가 엄청 높고 뒤로 갈수록 꽤나 암울하면서도 슬퍼서 뒷부분은 띄엄띄엄 봤는데, 아마 약간의 제 경험담 위주로 말할 거 같긴 하네요.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할 거 같긴 하지만 눈치는 챌 것 같이. 그리고 지금 밤을 새운 상태라서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쓸 거 같네요. 수강신청을 해야 하는데… 걱정이군요.


 다른 후기는 안 보고 쓰는 거라 이 영화에 대한 제 생각이 많이 다를 수도 있겠네요.


 요새 고민하고 있는 주제랑 많이 맞닿아있는 거 같아서 알바 끝나고 논문 보면서 축구 동시에 보다가 이 영화 보러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친구 영화 인스타 계정에 있어서 이 영화는 꼭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1년 정도 흘렀네요.


 마츠코의 인생을 혐오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마, 마츠코가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요. 마츠코가 빠진 마츠코의 인생이기 때문이니까요.


 구원이라는 게 셀프라는 말이 있지만 마츠코의 경우에는 좀 다릅니다. 마츠코의 곁에는 메구미가 있었습니다. 메구미는 마츠코가 투옥 생활을 하면서 사귄 친구로, 마츠코의 인생을 인생 그 자체로 바라봐준 친구입니다. 마츠코가 메구미를 내치게 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는데, 우선 마츠코는 우정을 어떠한 사랑의 형태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남편이 있어서 사랑받는 메구미한테서 무언의 알 수 없는 박탈감을 느꼈다는 점, 또한 마츠코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메구미와 같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점 등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저도 그랬어요. 요 몇 년간 그래왔습니다. 같은 사이클이 반복되면서 인생은 꼬이는데 제 상태와 제가 저지른 일들(범죄는 아니구요)을 말하면 저를 떠나갈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니더라구요. 류에게서 맞아서 멍이 든 마츠코를 보며 마츠코의 상태를 어느 정도 짐작하는 메구미의 모습이 나타나는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제 친구들도 저의 상태와 상황을 말없이 알고는 있었고, 저를 말없이 여러 방법으로 도와주려고 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나중에 깨달은 거지만 이 친구들 나 안 떠날 텐데 싶더군요. 깨달은 지 일주일도 안 됐습니다.


 저 같은 경우엔 사람을 많이 만나라는 말을 들어왔어요. 이게 비대면 수업이고 과 생활도 거의 안 하다 보니까 깊은 내면을 공유할 친구도 안 생기고 (아는 사람은 많은데) 그러다 보니 저만의 세계에 갇히게 되더군요. (실제로 혹자는 그건 너만의 자아를 파괴하라는 말 아니냐, 어떻게 사람을 노력을 해서 만나냐 이러는 경우도 있는데->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정말 노력을 하는 게 꽤 중요합니다. 배신 당하고 이용 당할 수 있지만, 이용 당할까봐 무서워서 사람을 안 만난다는 건 수학 문제 풀다가 틀릴까봐 무섭지만 수학 등급이 오르길 바라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저는 ‘어른’이 되어서 ‘독립’을 이룬다는 게 외로움을 온전히 혼자서만 감당하고 도움을 요청하지 말라는 뜻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 건강한 ’ 독립‘은 올바른 방법으로 좋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영화상 마츠코도 문제 해결을 ‘나름’ 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나름’이라는 건 통하지 않아요. ‘노력’은 꼭 상황을 타개시켜야 합니다. 영화에서 마츠코는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을 문제라고 여겼고 해결방법을 상대방에게 을이 되든 병이 되든 사랑을 받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감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방법은 아니겠습니다. 마츠코는 문제 자체를 잘못 정의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츠코의 인생이 꼬인 것은 마츠코의 교사시절 수학여행 때 마츠코를 흠모해서 돈을 훔쳐간 류때문이 아닙니다.(이때 류는 마츠코 제자였음) 뭐 이 원인까지 파고들면 심리학까지 파야할 거 같으니까 패스하고, 마츠코는 문제의 원인을 잘못 파악하고 잘못 파악한 지점에 매몰되어 버린 게 가장 큰 실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츠코의 문제는 마츠코 자신에 대해 모른다는 점이 가장 클 것입니다. 당장 자신의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보다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더 고려해왔을 테니까 그런 거겠지요.


 인생은 리셋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도와줄 사람은 정말 생각보다 가까이 있고 우리는 사람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츠코는 사람이 없지 않았냐고요? 이 영화가 마츠코 1인칭 관점이라는 것도 고려를 해봐야 합니다. 마츠코 주변에는 메구미도 있고 나중에 등장하지만 꽤 어린 조카도 있었습니다. 조카는 마츠코가 죽은 뒤에 메구미에게 마츠코의 얘기를 들으면서 마츠코의 인생을 그대로 존중해 줍니다. 마츠코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이기에 마츠코가 자기 세계에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이 부분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겠네요.


 저도 누군가를 좋아하면 을이 되길 자처하고 의견을 잘 내지를 못했습니다. 물론 제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 적도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상대방에게 맞추는 게 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버려지는 게 두려웠거든요. 아직도 두렵긴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깨달은 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는 거, 혼자여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마츠코가 있다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부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연결이 되어서 행복해지는 방법을 터득하길 바라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다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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