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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드리밍 Oct 30. 2024

유독 취약한 나의 아픈 손가락이 있나요?

오늘 올해 1월부터 준비해 왔던 텀블벅 전자책을 오픈했다.

'걱정반 설렘반'이라 오전 내 오픈 준비를 해두곤, 긴장을 풀러 슬렁슬렁 블로그 피드를 보던 중,


'공황장애가 시작되었습니다.'라는 책 제목에 무작정 이끌렸던 것 같다.

과거의 어떤 장면이 생각나서.


  과연 나의 과거의 그 장면이 공황장애였을까?

  

알 수 없다.


 어릴 적 기절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마치 기절하듯이 근무 중 평소처럼 3시에 회사 근처를 한 바퀴 산책하다가 눈앞이 까매지며 블랙아웃이 되었다.

 분명 눈을 뜨고 있었는데 앞이 모두 까맣게 변했고 그 자리에 나는 멈췄다. 눈이 보일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서웠다.


그 일이 있은 후 각성했다.

지금 이 회사에서 이 일의 상황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구나를 알았다.

 혼자 많이 울기도 했고 그날의 짧은 기록을 남기고 사무실로 돌아와 퇴사할 각오로 상사에게 무리한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 일 후에 오히려 일은 점점 해결되어 갔다.


 그랬다.

 지금껏 나는 아무리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도 버티다 버티다 늘 당사자들과의 대화로 직접 해결해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육아는 늘 달랐다.

 첫 단추부터 온 마을의 도움 없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무게가 컸다. 사실 직접 해보기 전까진 육아도 당연히 혼자 잘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는 늘 나의 의지와 선택으로 삶을 살아오던 사람이었으니까.


 이후 육아의 불확실성들이 닥치며 한두 가지에 대해 트라우마적 사건이 생겼다. 그 때문에 오히려 나는 육아에 대한 일부 성장 능력이 더뎌졌던 것 같다. 육아를 위한 여러 기능 중 몇 가지 능력들은 아마 아이가 매우 어릴 때 그때의 성능에 멈춰 있다.

 아직도 가끔, 아이가 무언가를 달라고 울고 떼쓰는 상황에서 오히려 아무 반응 못하고 멍 때리는 내가 있다. 그런 나를 흔들어 깨우는 남편 덕에 상황을 인지할 때가 있었다.


 나 자신, 엄마 말고 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안전지대를 좁혔다. 자기 방어였다.


 지금껏 살면서 다양한 방면으로 학습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는데 학창 시절 친구들은 오히려 적응을 잘하는 친구라는 피드백을 주기도 했다. 그런 내가

 왜 유독 육아에 이렇게나 취약한 걸까...?


 아무리 애쓰고 노력을 해도 안 되는 부분이 육아였다.

 사실 애쓰고 노력했기 때문에 안 됐던 것이었다.


 최근 읽은 빅터프랭클 심리학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서 심리적 반응 3단계 중 1단계가 충격 > 2단계가 무감각, 무반응이라고 > 3단계가 가둬뒀던 감정들을 토해내며 폭발해 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아이의 울음에 무반응하는 나의 육아의 장면이 떠올랐다.


 육아에 대한 심리적 트라우마가 생겼고

 그 부분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것 같다.

 그 이유는 정말 소중한 우리 가족, 아이들과의 이야기라 더 혼자 꽁꽁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일들이 발생했던 그 순간순간, 가볍게 이야기하며

 잘 해소해 왔더라면 좋았을 걸...

 근 몇 년간 처음으로 '후회'라는 걸 해 봤다.

 취약한 육아만큼은 늘 후회가 남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의 나였다면 낯설고 어려운 상황을 마주할 때 직접 부러뜨리거나 대화를 통해 오픈해서 직접 해결하며 나아가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육아만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아기라는 설정값을

아이들이 크고 나서도 늘 고정관념으로 받아들이고 엄마라는 역할과 책임감이 스스로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도록 했다.


 성장이 멈춰버린 나의 육아를 위한 기능의 일부를

 어떻게 회복하면 좋을까.


 그동안 육아의 어려움을 이야기 나눴던 우행 꿈 모임의 동행가분들이 떠올랐다. 그분들과의 인연 덕분에 무거웠던 무게의 짐이 한결 가벼워지기도 했다. 마치 대나무 숲 같은 효과였다.


 그리고 오늘 사마디톡에서 힐러진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잘못 끼워진 단추들을 다시 인지했다.

 

 오늘 나의 질문에 힐러진님은

 '잘 빠지게 되는 구멍이 있다.'라고 표현하셨다.


 나의 육아의 저하된 기능들 = 트라우마적 사건들이 모두 잘 빠지게 되는 구멍이었다.


 나의 육아의 부족한 기능이자 멈춰버린 기능.

1. 이성의 판단 대신 마음을 먼저 쓰기


 작년 육아 자의식이 와르르 무너졌을 때의 기록을 소환해 본다.

 그때도 비슷한 다짐들을 남겼더라....?


이때가 아이 앞에서 펑펑 울고 난 후 약 7일간 두 아이들과 가정 보육으로 막혀있던 감정들이 분출된 심리적 반응의 3단계였다. 그리고 그 책에는 3단계에 대한 추가설명이 있었다... (이 내용은 덧글에서..)

오늘 인지했으니 내일부턴 스스로 답을 찾아가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1년 전의 나보다는 그래도 꽤 성장해 왔다는 것. 적어도 그때 고민을 지금도 똑같이 하고 있진 않으니까.

 내 안의 엉켜버린 육아 실뭉치를 잘 풀어나가길 바라며.


 오늘 힐러진님의 북토크께서 솔직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주셔서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제는 꽤 괜찮은 줄 알았던

 내 마음의 고여있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제는 나를 붙잡고 있던 그 구멍들을

 그만 스스로 놓아주라고...

 더 편안한 미래로 나아가서 더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라고 세상이 선물을 보내주셨단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처럼 유독 취약한 아픈 손가락이 있진 않은가.

있다면 이렇게 한번 써보자.

 당시의 구체적인 사건들을 설명하고 언급할 필요까지도 없다. 그냥 내가 드러내고 꺼낼 수 있는 수준에서만 꺼내어 보면 된다.

 한 번이 어렵지 그다음은 더 쉬워질 테니까.


 한발 더 나아가려고

 아침 사과처럼 꺼내 먹어보는 기록.

 아픈 손가락이었는데 막상 꺼내보니 의외로 별로 아프진 않았다. 묵은 기억을 잘 털고 흘려보내야겠다.


 우리 함께 행복한 꿈 꿔요! 우행 꿈


[+덧글]

힐러진님께 인터뷰 질문의 글을 쓰는 순간

스스로 나의 답을 찾아갈 방법이 떠올랐다.


 사명감. 이자 천직

 이 일을 나의 사명이라 믿는 것....


 나의 어려웠던 일을 극복한 방법들을 세상에 나누고 공개함으로써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과 함께 내 안의 어려움을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과 교류로 치유하는 것이었다.


 내가 일로서. '내면 꿈 쓰기'라는 활동으로 나의 자존감을 회복해 온 그 방법론을 그대로 쓰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힘들었던 결핍의 지점들을 글로 쓰고 공개하고 당사자와 직면하고 이야기 나누고 마주하며 과거의 어려웠던 기억들을 미래에 좋은 방향으로 쓰며 나아왔다.


그런데 상황이 다른 점이 있었다.

육아는 나 혼자만의 상황이 아니란 생각이 강하다. 주체성이 부족하다는 것.

그럼에도 육아를 하다 보면 아이들을 나와 동일시한다는 것.

그리고 부모로서의 역할이 강하게 공존하다 보니

내가 가장 잘하는 방법. 보다 심플한 해결 방법에서 멈칫하게 됐었다. '부부의 일'이라고 정의해 버림으로써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막았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앞으로 어떻게 풀어갈까 고민되는 지점이다.

이 또한 스스로 잘 답을 찾아가겠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

 얼마 전부터 아이가 엄마 책을 쓸 때 자신도 함께 쓰고  싶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래 그러자며 가볍게 넘겼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도 같기도 하다.

 아이와 함께 대화하며 풀어가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올해 쓰고 싶다던 소설. 배경 설정만 있었던 그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이 떠올랐다.


 아이와 함께 서로의 상처들을 치유하며

 글을 쓰고 공개할 수 있기를...



 이 글은 올해 초 썼던 글을 이제야 발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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