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드리밍 Nov 07. 2024

나는 주의력이 낮은 엄마다.

그런 나를 용서하기로 했다.

나는 주의력이 낮은 엄마다.

살면서 지금껏 스스로 주의력이 낮다고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왜냐하면 알고 보니 우리 엄마, 아빠도 그리 주의력이 높으신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부모의 문화적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내가 딱히 주의력이 없거나 하는 것에 대한 불편을 느끼지 못하며 자랐다.


 그런데 결혼을 하며 달라졌다.

 작은 습관 하나하나도 상대적으로 엄청 꼼꼼했던 남편과 만나며 그런 생활 습관들이 부딪히며 우리 부부는 참 많이 다퉜다. 그렇게 작은 습관들을 하나씩 맞춰가고 어느 정도 편안해졌을 때쯤 아이가 태어났다.

 지금껏 나의 불편함을 모르고 살았던 나는 아이를 키우며 또 한 번 '주의력'이라는 주제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스스로 많이 좌절했다.

 '나는 대체 왜 이러지'를 수없이 되뇌었다.

 아이의 작은 행동들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해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생기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렇게 육아에 대한 부정적 경험과 정서가 쌓이며 오히려 더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엄마의 주의력 부족, 순간의 놓침이 큰 사고로 이어졌다. 그렇게 억지로 많은 노력과 에너지를 쓰며 작은 일들에 신경을 쓰는 엄마가 되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태어나니 더 심해졌다.

 

 어제는 아주 잠깐의 사고로 아이의 손가락이 문에 찧여서 손톱이 빠질 듯이 들렸다. 부랴부랴 근처 외상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죄책감이 컸다. 결국은 또 모두 엄마의 실수였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엄마의 실수로 아이가 다치는 일들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다.

 왜 이 모든 일들을 엄마가 혼자 감당해야 하지? 때론 그게 너무 벅차고 힘들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은 아이가 16개월일 때도 있었다. 잠깐 하는 사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눈썹 위를 몇 바늘을 꿰맸다. 그때도 참 마음이 무거웠다.


 'ADHD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아이를 10명 키우는 것과 같다고 한다. 모든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아이라서 주의력 부족이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 둘을 혼자 키우고 있는 엄마의 느낌이었달까...'

 

 어제도 스스로 많이 좌절했다.  그리고 엄마 말고, 나라는 사람의 고유성을 지키고 싶었다. 주의력이 깊지 않은 나였지만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불편함이 없었다. 운이 좋게도 나는 나의 부모님의 가르침 덕분에 지금껏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없이 잘 자란 거였다.

 하지만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다르다. 작은 습관들 하나도 아이의 안전을 위해 엄마부터 바꿔야 했다. 그렇게 나의 고유성을 잃어가는 엄마가 되어갔다.

 

 그리고 돌아보니 최근 가족에 대한 일들은 내가 직접 선택한 일이 없음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가족의 선택이 우선이었고 그 선택을 따르고 맞춰 줬다.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 일은 없으면서 오히려 그래서 가족의 책임으로 돌리기에 바빴던 것 같다.

 책임을 회피하고선, 정작 선택한 타인을 비난하거나 책임을 무는 일이 생겨버리기도 했다.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의 실수들, 부모로서 부모가 되는 성장 과정의 시행착오들을 같이 겪으며 우리 가족은 매일 성장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또한 모두 나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책임을 회피해 왔구나. 작은 선택이라도 아이들/가족이 아닌 내가 직접해야 했는데, 의견을 조정하고 협의하는 것도 결국 가족 내에서 맞춰가며 사회성을 배워야 하는 것들인데 그러지 못했음을 반성했다.


 엄마라는 이유로 아이들, 가족들이 원하는 것들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때로는 엄마는 늘 희생하면서 피해 의식에 쌓여 있었나 보다. 하지만 사실은 정작 엄마는 직접 선택을 회피하면서 오히려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고 있었구나를 깨달았다.


 나의, 엄마의, 스스로의 문제였다.

 가족 내에서 스스로 삶의 주도권을 가지지 못한 나의 문제였다.


 많은 엄마들이 자신이 가족을 위해 '희생'해 왔다고 생각한다. 맞다. 사실은 엄마들의 희생이 사랑으로 표현되어 온 가족과 어쩌면 나라까지도 살린다. 하지만 그 누가 그렇게 '희생'만 하라고 강요했을까.

 어느 누가 엄마가 되면 희생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는데 자연스레 엄마는 희생하고 양보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의 어머니가, 우리의 어머니들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라왔으니까.


 과연 나는 우리 딸에게 어떤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내 딸이 자녀를 낳아서 어떤 엄마가 되면 좋을까를 고민했다.


 우리 딸이 엄마가 된다면 자신의 가정을 잘 케어하며 자신의 일도 균형 있게 잘 유지하며 성장하도록 돕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그런 모습을 보여야 했다.

 

 엄마도 선택해야 한다.

 희생을 선택한 것도 엄마다.

 지금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 삶을 바꿔야 한다. 나부터 엄마부터.


 사람은 심리적으로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자신과 닮았으면 한다. 그래서 자꾸 가까이 있는 사람을 바꾸려 한다. 그런데 사실 그게 죽어도 안된다. 잔소리가 될 뿐이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가족생활처럼 만들고 싶어 한다. 가족의 평등한 문화를 사회 전체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사회와 경제를 또 다른 버전의 가족으로 만들려 한다. – 애덤 스미스,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그렇다면 과연 가족의 문화는 평등한가?

 사회생활과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그렇다.

 하지만 가족 내 개개인의 조직 구성원은 과연 모두가 만족하고 있을까?


 가족 문화는 결국 엄마부터 바뀌어야 한다. 사랑의 마음으로. 

 1:1 개별이 아니라 외부 환경인 시스템으로 밖에서 안으로 자연스럽게 습관이 바뀌도록 세팅을 해야 한다.

 이론으론 알지만 늘 적용은 어렵다.


 벌써 두 번째 육아인데 아직도 늘 부족하고 서툰 엄마라서.

 참 많이 미안하고 가족들에게 사랑을 더 많이 나눠주는

 좀 더 현명한 엄마가 되고 싶다.



 엄마의 힘, 사랑이 늘 이긴다.

 사랑의 힘으로 어제의 나를 용서하며 오늘도 힘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 바본가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