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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미 Sep 02. 2020

사랑해, 콩이

강낭콩과의 불편한(?) 동거

기다리고 기다리던 점심 급식 시간이었다. 하루 중 학교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4교시 체육을 끝내서인지 다들 평소보다 더욱 허기진 상태였다. 오늘은 급식 인기 메뉴인 닭강정이 메인 반찬으로 등장했다. 우리 학교에는 식당이 없어서 교실 배식을 하고 있는 터라 3명의 급식 당번이 정해져 있었다. 급식 당번은 급식 준비에서부터 배식, 뒷정리까지 담당하는데 인기 메뉴가 등장하는 날에는 급식 당번의 노하우가 필요했다.


인기 메뉴일 경우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적정량을 각자에게 배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는 많이 줬니, 누구는 적게 줬니 하며 급식 당번과 배식받는 아이들 사이에 사소한 언쟁이 오갈 수 있다. 그 언쟁이 그들 선에서 해결되지 않으면 '선생님'하며 식사를 하고 있는 내게로 쪼르르 달려오기 때문에 나의 소중한 식사시간이 방해받을 수도 있다. 특히나 저학년일수록 말이다.  


아이들은 급식을 받기 위해 모둠 순서대로 줄을 섰다. 담임 선생님의 특권으로 가장 먼저 배식받고 식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순조롭게 배식이 이어지던 중 닭강정을 배식하는 하람이와 배식받는 찬영이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조금만 더 줘."


"안돼!" 


"에이, 그러지 말고 하나만 더 줘."


"안돼, 우린 뭐 땅 파서 장사하냐." 


닭강정을 더 달라는 찬영이에게 핀잔을 주는 하람이의 4학년 같지 않은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얄짤없는 하람이와 급식 당번들의 배식이 끝나고 나름 평화로운 점심시간이 지나갔다.




5교시 과학 시간이었다. 오늘 수업 내용은 강낭콩을 심는 것이었다. 2인 1조로 화분 하나에 강낭콩을 심고 한 달 동안 함께 키우면서 관찰하고 일지를 기록해야 했다.


"국어 시간에 본 동영상 기억하지? 식물도 예쁜 말을 많이 해주면 쑥쑥 잘 자라고 좋지 않은 말이나 욕을 하면 잘 자라지 못하거나 시들어 버린단다. 강낭콩을 함께 잘 키울 수 있는 짝을 정해서 선생님께 강낭콩이랑 화분, 흙을 받아가렴. 짝이 없는 친구들은 선생님이 정해줄 거야."


공교롭게도 남자아이들 중에서 짝이 정해지지 않은 아이들은 하람이와 찬영이 2명이었다. 하람이는 워낙 장난기가 심하고 말이 많아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찬영이는 반 친구들과 두루 잘 지내는 편이라 특별히 친한 단짝 친구가 없었다. 짝을 정해오지 않은 하람이와 찬영이가 강낭콩을 함께 심을 파트너가 되었다.


아이들은 2인 1조로 받은 강낭콩과 화분, 흙을 이용해 모두 강낭콩 심기에 열중했다. 그 와중에 갑자기 하람이가 내게 와서 말했다.


"선생님, 화분에 강낭콩을 심는데 찬영이가 계속 강낭콩에다 대고 씨X이라고 욕해요."


"그래? 그러면 선생님이 경고 한번 준다고 이야기하고 찬영이한테 더 이상 욕하지 말라고 전하렴."


잠시 후 하람이가 다시 와서 일렀다.


"찬영이한테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전했는데도 계속 강낭콩에다 대고 씨X, 씨X, 씨X이라고 하고 있어요."


평소에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찬영이였기에 이상한 생각이 들면서도 화가 나서 찬영이를 불렀다.


"선생님이 식물에 나쁜 말 하지 말고 예쁜 말 해 줘야 잘 자란다고 했잖아. 소중하게 키우라고 준 강낭콩인데 찬영이가 어떻게 그렇게 나쁜 말들을 할 수 있지?"


"저 강낭콩 필요 없어요."


"그럼 넌 강낭콩 키우지 마. 찬영이는 식물 키울 자격도 없으니. 그리고 강낭콩 심고 관찰하기 수행평가는 찬영이만 하지 않는 걸로 하겠다."


"상관없어요."


더 이상 찬영이와 이야기하면 나는 야단만 치고 찬영이는 계속 삐딱하게 나갈 것 같아서 찬영이가 강낭콩 키우지 않는 것으로 하고 이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일찍 출근해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데 메시지가 하나 왔다. 찬영이 어머니였다.


'선생님, 어제 찬영이가 했던 행동을 다른 친구의 어머니로부터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찬영이가 하람이랑 자주 투닥거리는데 아마 강낭콩을 함께 키우는 짝이 하람이가 되어서 그런 행동을 했나 봅니다. 찬영이도 많이 반성하고 있으니 강낭콩을 다시 키우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초등학교 저학년과 중학년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정보공유력이 대단하다. 학교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까지 어느새 다 공유되고 있었다. 찬영이 어머니의 메시지를 받고 어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짚어보니 찬영이의 행동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잠시 후, 찬영이가 아침 일찍 제일 먼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곧장 나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저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뭔데?"


"어제 정말 죄송했습니다."


난 웃으며 이야기했다.


" 왜, 엄마가 선생님한테 가서 사과드리라고 시켰냐?" 


" 아니에요. 제가 잘못한 것 같아서 사과드리고 싶었어요."


멋쩍은 듯이 찬영이도 웃었다. 


"선생님도 미안해. 어제 찬영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몰라줘서. 어제 선생님 마음도 많이 불편했는데 찬영이가 먼저 다가와 사과해줘서 고마워. 찬영이가 원하면 강낭콩 같이 키우는 짝을 바꿔줄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람이랑 강낭콩 잘 키워볼게요~."




다음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교실 창문을 열면서 창문가에 가지런히 놓인 강낭콩 화분들을 보았다. 아이들이 정성을 다해 심어 놓은 강낭콩 화분들 중 찬영이와 하람이가 함께 키우는 강낭콩 화분에 눈길이 갔다. 거기에는 하트 뿅뿅 표시로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화분 팻말이 꽂혀있었다. 


♥♥   사랑해, 콩이   ♥♥




   


배경 사진 출처  :    https://hhk2001.tistory.com/5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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