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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징느 Feb 08. 2024

[일기 읽는 시간] 팥칼국수와 소울푸드

2013년 11월 5일의 일기

2013년11월5일

 일기의 시작이 ‘아침에 먹은 팥칼국수 때문에 하루의 시작이 좋았다’인걸 보니, 그날도 엄마가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여 팥칼국수를 만들어 주셨던 모양이다. 엄마는 늘 칼국수를 사지 않고 반죽을 밀어서 만드셨다. 팥물은 언제나 아주 걸쭉하게 직접 만드셨고, 끓이는 중간중간 계속 저어주기까지 해야 하니 분명 손이 많이 가고 만들기 번거로우실 텐데도, 엄마는 늘 그 방법으로 팥칼국수를 만드셨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도 팥죽은 달지 않은 걸쭉한 국물에 투박한 국수가 있는 그 팥칼국수이다(엄마의 고향은 전라도이고, 호남에서는 팥칼국수가 정통 ‘팥죽’이었다고 한다. 새알심이 들어가는 팥죽은 ‘동지팥죽’이라고 부른다).

 

 팥칼국수가 먹고 싶다고 했다가, ‘에이 오래 걸리니까 안 먹을래, 이것저것 한참 하셔야 되잖아요’ 그러면, 엄마는 언제나 ‘네 외할머니가 손만큼 부지런한 게 없고 눈만큼 게으른 게 없다고 하셨어, 그 말이 딱 맞다’라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가끔 팥칼국수가 생각나 ‘전라도 팥칼국수’라고 크게 써놓은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해보기도 했지만, 손칼국수를 만들어 쓰는 곳도, 걸쭉하고 진한 팥국물을 내주는 곳도 거의 없다. 팥칼국수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팔면서 그런 퀄리티를 기대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니, 불만이랄 것도 없다. 그리고 ‘에이, 이건 아니지’라면서 엄마의 팥칼국수를 생각할 때, 조금은 즐겁기도 하다. 일종의 자부심 비슷한 것인데 아주 복합적인 감정이라 정확히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마치 나만, 내 엄마로부터만 받을 수 있는 사랑을 먹는 기분이랄까. 그 팥칼국수는 친정집에서만 먹을 수 있는 우리 엄마의 음식이다. 그리고 나의 소울푸드다.


 소울푸드는 원래 미국 남부 흑인들의 전통 음식을 가리키는 용어였다고 하나, 현재는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음식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쓰인다. 주로 자신만의 추억을 간직한 음식이나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데, 국립국어원에서는 이 말을 ‘위안음식’이라는 순화어로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위안(慰安): 위로하여 마음을 편하게 함. 또는 그렇게 하여 주는 대상
- 표준국어대사전

 ‘맛있는 음식’, ‘기분이 좋아지는 음식’같이 말의 무게가 가볍지 않고, 마음속 깊이 있는(때로는 상처를 받은) 내 영혼을 끄집어내어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음식이야' , '이 음식을 먹고 위안을 얻으렴' 같은 메시지를 주는 음식. 나는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은 없지만 소울푸드는 있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때의 자잘한 기쁨은 누리지 못할지언정, 위안을 받을 음식은 있다.


 하지만 엄마가 있어야 한다. 마흔이 되고 애엄마가 되어도 '내 엄마'가 있어야 소울푸드를 먹을 수 있다니. 어쩌면 그것이 매사 별생각 없고 감상이 없는 나에게 소울푸드가 있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 음식에는 스토리가 있으니까, 나에게 소울푸드는 맛이 아니라 이야기니까.


그래서 나는 팥칼국수 만드는 방법을 배우지 않는다. 귀찮아서가 아니다,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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