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
영어 고수들과 토플 리스닝 수업을 들었다. 1등급 영어 강사, 외대 대학원 출신 강사까지 쟁쟁한 사람들 틈에 앉아 첫 수업에 참여했다. 유난히 리스닝이 약한 나는 긴장을 했는지 평소보다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
강의가 시작되었다. 강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첫 수업을 이끌었다. 토플 리스닝은 사실, 영어가 문제가 아니라 한국어로 들려주어도 문제를 못 푸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리스닝을 시작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총 6문제 중 나는 5개를 맞추고, 영어 좀 하는 강사 출신 수강생들이 2~3개를 맞췄다. 평상시 독서량도 많은 1등급 전문 강사는 적잖게 당황하는 눈치였다. 곁눈질 사이로 그녀의 기색이 느껴졌다. 한국인의 ‘한국어 듣기 평가’ 실력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사실 나는 한국어로 듣는데도 불구하고 반타작을 맞은 이들의 결과를 예상했다. 평상시 그들의 대화 습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대화는 상대방의 말보다 자신의 주장에 집중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말을 할 때도, 머릿속에 자신이 할 말을 생각하느냐고 바쁘다. 당연히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다.
리스닝 지문은 두 사람의 대화였다. 평상시에도 자신이 하는 말에 유난히 집중하던 이들이 제삼자가 되어 남의 말에 집중하려니 결과는 당연했다. 원래 습관대로 추측하거나 자신의 방식대로 재해석하면서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다. 내 결과에 만족스러워서가 아니라, 결과가 충분히 이해가 되어서 속으로 웃음이 났다.
신약 성경 야고보서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김미경 강사는 잘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을 귀명창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랬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릴 때, 나는 귀명창이었다. 그래서 나는 보이는 현상에서 보이지 않는 내적 동기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위치를 바꾸면 된다. 마주 앉지 말고, 상대방의 옆에 서서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면, 충분히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영역이다.
어느 날 문득, 달라진 나를 만났다. 듣기는 더디 하고 말하기를 속히 하는 어리석은 나를 대면했다. 하루 동안 내가 쏟아내는 말을 세어보고 싶어졌다.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사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부끄러웠다. 마흔의 나는 예전보다 확실히 말이 많아진 것 같다. 하늘 아래 부끄러웠을까. 한참 동안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지나친 내 말을 아무 내색 없이 들어준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인가보다.
나는 토플반 동기들이 왜 그렇게 자주 오해를 했는지 안다. 코 평수를 넓혀가며 뜨거운 바람을 일으켰는지도 안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안다. 오해는 상대방의 잘못이 아니라, 제대로 듣지 못한 내 잘못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