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곳이 필요했다
안개에 가려진 산을 보았다. 뿌연 안개는 사시사철 민낯을 드러내야 했던 산에게 가끔 허락된 쉼이다. 산은 자신을 가릴 방법이 없다. 주어진 모든 시간과 삶 속에서 정직하고 진실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산도 가끔은 숨고 싶을 때가 있을 것 같다.
숨을 곳이 필요했다. 어쩌면 나는 쉴 곳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내 인생을 문득 대면할 때, 그 시간 속에서 나는 꽤 고독하고 고된 씨름을 한다. 때론 격동하는 파도 같은 감정을 삼키느라 가슴을 치기도 하고, 가끔은 바다 깊은 곳을 향해 한없이 내려앉아 심해의 깊은 어둠 속에 자리 잡을 때도 있다.
방 한 칸 덩그러니 있는 외딴 마을에서 낯선 생활을 한다. 살면서 필요한 모든 것이 여기에 들어와 있다. 그간 너무 많은 것을 끌어안고 살았나 보다. 사실 일상의 큰 변화는 없다. 달라진 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나를 내려놓기에 거리낌이 없는 공간이다. 한동안 멀리 밀어냈던 나 자신과 친해질 시간이다.
이 동네는 아침부터 밤까지 떠드는 사람이 없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아침 녘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뿐이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정말 노래를 하는 것 같다. 가끔 택배 기사의 트럭 소리도 들린다. 한없이 고요하게, 지극히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기에 충분한 마을이다.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울 수 있다. 혼자 있을 때나, 함께 살 때나 외로운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결혼의 유무나 가족 구성원의 숫자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고독은 사람의 숙명일까.
혼자 있을 때 찾아오는 고독은 함께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보다 견딜 만하다. 그래서 즐거움이라고 말했나 보다. 고독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은 함께 할 때 스며드는 외로움 따위는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 몸과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단련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한번 살아보기로 했다. 적막이 둘러싼 여기 이곳, 포승 마을에서. 이 시간이 진정 괜찮아질 때, 평생 혼자 살아도 괜찮겠다 싶을 때, 그때 함께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