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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행 Nov 30. 2021

역무 다이어리 2 - 황당한 육아휴직 사유

이 내용은 99.9% 허구입니다.



2020년 8월 어느 날.


김부역장 - 송주임. 7급에서 표창 없지?

송주임 - 네. 아직 없어요.

김부역장 - 음.. 왜 못 받았지?

송주임 - 하하, 일을 잘 안 해서 그런가 보죠 뭐.


송주임은 표창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큰 역에 있으면 자주 상신되는 표창이지만, 큰 역에 있을 때 진급하고 싶어 하는 4급, 5급 직원이 많았기에 그들에게 차례대로 돌아갔다.

가장 황당했던 건 상가 관리 우수역 표창이었는데, 단속 실적을 관리한 문서는 송주임이 다 작성했지만 한 번도 이 업무에 관여하지 않은 4급 직원에게 상가 관리 표창이 돌아갔다.

아직 7급이라는 이유로 다음에 챙겨준다고 했지만 믿지 않았다.

그리고는 발령이 났고 한가한 역이라 일 년에 한 번 받을까 말까 해서 포기하고 있었다.

실은 작년에 아무도 안 받겠다 해서(재정이 안 좋아 상품권으로 주던 표창 상금도 없어져 진급을 원하는 사람 아니면 큰 의미가 없다)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전임 역장이 송주임이 결혼 때 휴가를 길게 썼다고 마음에 안 들어해서 기어코 다른 사람을 주었다.

그렇게 받은 직원은 원하지도 않는데 마음대로 표창을 줬다며 표창을 역무실에 방치해두고는 발령이 나서 떠났다.


김부역장 - 그럼 역장님께 말해볼까?

송주임 - 곧 진급인데 필요 있을까요?

김부역장 - 그래도 이왕이면 직급마다 하나씩 받으면 좋지. 이번에 송주임이 맡은 업무가 꽤 있으니까 한번 말해볼게.


김부역장은 부역장이 된 지 2년밖에 안된 신임 부역장이지만 같은 조 직원들을 잘 챙기는 부역장이다.

20살 이상 차이나는 주임들과 잘 지내보려고 잘 마시지 않던 스무디까지 자주 마시며 잘 지내보려고 노력 중이다. 요즘 신입 직원들은 똑부러지고 업무를 잘해서 주임들과 근무하는 게 좋은 김부역장이다.

김부역장은 송주임에게 표창을 주는 게 어떠냐고 역장에게 의견을 물었고 역장도 동의했다.

바로 표창 공적조서 쓴 다음 센터에 보내려고 바탕화면에 저장해놓고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부역장 - 아니, 이게 뭐야? 송주임이 표창을 받아? 난 들은 게 없는데?

김부역장 - 아 말씀 안 드렸구나. 이번에 역장님과 상의해서 송주임 표창 주기로 했어요.

한부역장 - 아니, 이대리도 표창 없는데 나랑 상의도 없이 송주임 주면 어떡해!

김부역장 - 네? 그런 말씀 한 번도 없었잖아요. 미리 말씀하셨으면...


한부역장은 부역장이 된 지 15년이 넘은 부역장이고 곧 퇴직을 앞두고 있다. 평소에도 마치 본인이 상사인 것 마냥 다른 부역장에게 지시하는 말투로 인수인계를 해서 악평이 자자하다. 이번에 본인에게 미리 상의를 안 하고 표창을 주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김부역장이 예상 못한 바는 아니지만, 말을 꺼냈다 괜히 틀어질까 봐 역장 하고만 상의한 것도 있었다.

김부역장은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하며 황급히 퇴근한다.


그다음 당무에 출근하니 한부역장 조 직원들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회의실에 앉아있고 역장이 김부역장 조도 부른다. 한부역장이 역장에게 강하게 항의했는지 난처한 표정의 역장이다.


역장 - 음, 이대리가 진급 후 표창이 없는 건 알겠지만 송주임이 이 역에 온 지 오래됐고 요즘 맡은 업무도 많아요. 아예 필요 없는 표창은 아닌 게 올해 근평에서 주임이 두 명밖에 안돼서 표창이 없으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어 받으면 좋은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정대로 송주임을 주려고 합니다.

정과장 - 제가 부역장님들과 역장님 얘기에 끼어들어서 죄송하지만, 한부역장님이 선임 부역장인데 건너뛰고 결정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정과장의 발언에 송주임과 김부역장은 좌불안석이다.

정과장은 김부역장과 동기이자 20여 년 전 수석으로 입사한 직원이다. 평소 본인이 진급이 늦어진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송주임은 왜 늦어졌는지 알 것 같다. 전임 역장이 있을 때 조 편성에 불만이 생겨 일절 인사를 하지 않고 역장에게 찾아가 똑바로 하라고 했던 잔다르크다.

사실 송주임은 양보를 할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전화까지 하며 양보하라고 하니 갑자기 오기가 생겨서 받겠다고 했다. 그리고 사실 역장 말대로 이번 표창이 아예 필요가 없는 건 아니다. 근평은 성과급까지 연관되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금전적인 혜택이 있고, 무엇보다 말 그대로 표창이기에 그동안 일한 것에 대한 칭찬 같은 의미라 받으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역장 - 정과장님 말씀도 이해하지만, 어쨌거나 결정권자는 접니다. 송주임을 주는 걸로 결정하겠으니 더는 이걸로 분란 없으면 합니다.


일이 좀 커졌다. 송주임은 '누구는 손하나 까딱도 안 하고 표창받는데 나는 뭐 이렇게 힘들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챙겨주는 김부역장이 고마워 굽히지 않기로 했다.

이 사건으로 평소 대화 자주 하고 사이가 괜찮았던 송주임과 이대리는 서먹해졌고, 정과장은 김부역장 조원들과 일절 눈을 마주치지 않고 냉랭했다.



1년이 지난 2021년 9월의 어느 날.


역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 역장이 바뀌고, 정과장은 고충처리로 다른 역에 가고 송주임은 대리로 진급했다.

이대리는 육아휴직에 들어갔고 그 자리에 신입사원인 권사원이 전입 왔다.

권사원은 의욕적인 역장을 만나 중대재해 처벌법 관련 공모, 환경정비, 안전신문고 등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교대근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셀프 추가 근무까지 하며 열심히 일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사원이지만 역장이 표창을 챙겨줬다. 송대리는 권사원이 안쓰러웠지만 표창을 받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김부역장 - 송대리 괜히 작년에 표창받아서 올해 못 받는 거 아니야? 괜히 미안하네..

송대리 - 무슨 말씀이세요. 권사원이 정말 열심히 했잖아요. 새삼스럽지만 작년 일은 정말 감사했어요. 저는 앞으로 받을 일 많을 테니 걱정 마세요. 항상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역장님.


김부역장은 송대리가 작년 표창 때문에 이번에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고 미안하다. 송대리는 같은 역에서 두 번 받는 것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고, 작년처럼 진급 직전에만 받지 않으면 되는 것이니 마음이 급하지 않다.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퇴근을 준비하고 있는데 한부역장이 왔다.


한부역장 - 이번에 권사원이 받는 거 서운하지?

송대리 - 네? 정말 안 서운해요. 권사원 열심히 했잖아요.

한부역장 - 거봐, 작년에 그 일만 아니었어도 이대리가 육아 휴직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야.

송대리 -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한부역장 - 아니야, 들어가 봐.

송대리 - ......


김부역장도 같이 듣고 놀랐지만, 송대리한테 신경 쓰지 말라며 위로한다.

집에 온 송대리는 이해가 되지 않다가도 정말 저 이유 때문에 육아휴직을 한 건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괜히 한부역장이 이간질을 해서 이대리처럼 권사원과 사이가 서먹해질까 봐 축하한다고 정말 하나도 서운하지 않다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낸다.


다음 당무에 출근한 송대리는 역장에게 면담을 요청한다.

송대리 - 한부역장님께서 이대리님이 육아 휴직한 이유가 작년에 표창 못 받은 게 서운해서라는데 사실인가요?

역장 -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이대리님 아이가 어린이집에 적응 못해서 육아 휴직한다고 했는데... 표창 못 받아서 육아 휴직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더군다나 육아휴직은 무급인데.

송대리 - 그런 거겠죠? 뭔가 찜찜해서요.

역장 - 아이고 한부역장님이 괜한 소리를 했네. 안 그래도 김부역장님한테 듣고 나도 황당했는데 제가 한부역장님께 잘 말씀드릴게요.

송대리 - 네 감사합니다.


송대리는 여전히 찜찜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리한테 연락할 수는 없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그러고 나서 한 달 후 김부역장에게 말한 대로 송대리는 외부에서 한 사내활동으로 표창을 받게 되었다.


오늘도 평화로운 역무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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