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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선 Jan 03. 2021

해물파전에 막걸리 한잔

새해 첫날 어린이 대공원에서



새해 첫날 왠지 맥 빠지는 기분이었다. 3일 연휴가 시작되지만 아무것도 할 것도, 할 수도 없다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미리 준비했던 계획은 어그러지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어도 그리 달라질 것도 없구나 싶었다.


우리 가게는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주 6일 영업을 한다. 여러 가게가 입점해 있는 재래시장이라 쉬는 날이 정해져 있어 별일 없는 한 쉬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쉬지는 못한다. 공휴일도 가게를 열어야 하기 때문에 명절 말고 3일 쉬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쉽지 않은 기회라 2년 전부터 이번 연휴에 남편과 여행을 갈 계획을  세워 두었었다. 출근은 새벽에 하지만 도매시장이라 저녁 일찍 마치니까 연휴 전날 밤에 떠나 3박 5일 정도 동남아 여행을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코로나로 해외여행은 길이 막혀서 아예 엄두도 못 내고 계획을 접어야 했다. 아쉽지만 가까운 경주라도 둘이서 가기로 하고 한 달 전부터 숙소까지 예약해 두었다. 혹시 몰라 12월 23일까지 무료 취소되는 곳으로 예약했는데 왜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건지 12월이 되자 일일 확진자는 천명 대를 넘기며 더 심해졌고 사회적 거리두기도 2.5 단계로 확대되었다. 억지로 가려면 갈 수 있겠지만 이런 상황에 정부 지침이나 개인 방역 수칙은 지켜야 하지 않겠냐며 눈물을 머금고 숙소를 취소했다. 아...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지? 그렇겠지?




연휴 첫날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그냥 집에서 뒹굴거리는데 여행사 하는 선배가 남편에게 전화를 해왔다.

형님 새해 첫날인데 술 한 잔 하시죠.

그래 집으로 와서 한 잔 하자.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어린이 대공원 어떨까요?

그럼 8호점에서 4시 반에 보자.


우리 집에서 걸어서 3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어린이 대공원이 있다. 산에서 시작되어 내려오는 호수 주위로 3km 정도의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고 그 길을 따라 여러 군데 휴게소 겸 식당이 있었다. 등산이나 산림욕장을 걷고 나서 우리가 꼭 들르는 휴게소가 있는데 여덟 번째라 8호점 또는 호반의 벤치라고 부르는 곳이다.


어린이 대공원 입구

오랜만에 바람을 쐬니까 기분이 너무 좋다. 강아지처럼 촐랑대는 날보고 그래도 밖에 나오니 그렇게 기분이 좋냐며 남편이 놀린다. 사람들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산책하는 분들이 더러 보인다. 공원 입구로 들어서는데 선배가 다시 전화를 해왔다. 연휴라 8호점 문을 안 열었나 싶었는데 선배도 불안해서 일찍 가보았더니 오늘 영업한다며 먼저 자리를 잡고 있겠단다.


올라가는 동안 보이는 풍경

부산에서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잘 없는데 요즘은 날씨가 제법 춥다. 따뜻하게 입었지만 숲길로 들어서니 찬바람이 코끝, 손끝을 제법 시리게 만든다. 그래도 숲과 나무의 상큼한 향기와 겨울이라 휑한 듯하면서도 분위기 있는 호수의 모습에 뭔가 답답했던 마음이 힐링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과 가까워서 올 때마다 많이 보는 풍경인데도 볼 때마다 더 좋다.

진작 나올걸 그랬나 싶다.


호반의 벤치 입구


주로 가는 이층에는 손님이 두 팀 있어서 삼층 작은 공간으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다. 다른 계절에는 비닐 천막이 없어 경치가 더 좋은데 겨울이라 정자 주위를 비닐로 둘러싸 놓았다. 날씨가 추우니 어쩔 수 없지 하며 들어서는데 생각보다 분위기가 더 좋았다. 비닐 너머로 보이는 호수의 모습도 나쁘지 않았고, 난로가 있는 천막 안 공간의 모습은 아늑하고 우리끼리만 있어 더 정감 있게 느껴졌다.


천막 너머로 보이는 호수 풍경
해물 파전에 막걸리 한 잔


이 집의 인기 메뉴 해물 파전과 막걸리를 주문했다. 나는 막걸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이 곳에 오면 꼭 한 잔 정도는 마셔줘야 한다. 찰떡궁합이기 때문이다. 금정산성 막걸리를 시켜서 잔에 따라 한 모금 마시니 다른 것보다 누룩향이 더 많이 나고 좀 쌉싸름한 맛이 난다. 매번 느끼는 생각이지만 파전 역시 너무 맛있다. 사는 게 별거 없는데 왜 이리 아등바등 애쓰고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파전에 막걸리 한 잔으로도 이리 행복한 것을...



'호반의 벤치' 이름부터 낭만적이다. 여러 휴게소 중 전망이 가장 좋아서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곳이다. 비가 오는 날에는 호수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호수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물론 다른 손님이 없을 경우에)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다. 막걸리 잔을 짠 부딪치고 해물 파전 한 점 먹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어느 날, 어느 계절에 와도 좋은 곳, 가끔 한 번씩 생각나면 슬그머니 웃음이 나는 곳, 우리의 수많은 추억이 서린 곳이다.


그래. 동남아 못 가면 어떻고 경주 못 가면 어떠냐.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곳에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진정 사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오늘도 이렇게 힘들다 생각 말고 오늘은 이래서 또 행복하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해가 저물면서 부쩍  추워진 날씨에 옷깃을 올리고 다시 산책길을 돌아 내려온다. 슬쩍 남편 옆에서 발걸음을 맞춰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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