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에는 풍광이 좋은 정자들이 있다. 몇 해 전, 함안에 왔다가 정자 이름이 마음에 들어 무작정 찾아갔던 무진정의 아름다움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때문에 이번 함안 여행에서는 마음먹고 정자를 보려고 악양루(岳陽樓)를 선택했다. 전국의 이름난 정자들은 품고 있는 경치에 어울리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 때문에 가고 싶은 정자를 고를 때, 때론 그 이름이 한몫을 한다.
특별한 곳을 빼고는 가고 싶은 정자를 인터넷에서 찾는다. 인터넷에 올라온 자료들을 보면 정자의 내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해놓았는데, 정작 정자가 끌어안고 있는 풍광이나 경치에 관해서는 설명이 길지 않다. 정자 하니까 모든 초점이 정자에만 맞추어진 것 같다. 그건 정자 여행의 절반에 해당한다. 정자와 함께 품은 경치가 보태질 때 온전하게 정자 여행이 완성된다. 때론 정자만의 아름다움으로도 완성될 수 있지만, 기왕이면 정자와 경치가 함께 어우러져야 제 멋이다.
“악양”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중국의 악양은 빼어난 풍광으로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명승지라는 것을 귀동냥으로 알고 있다. TV에서 보는 여행프로그램 덕분이기도 하지만, 젊은 날 한동안 푹 빠졌던 무협지에 자주 등장했던 곳이라 친숙하게 다가온다.
함안 악양루에서 보는 풍광이 중국 악양에 비길만하다고 해서 악양루라고 지었다고 한다. 보지 못한 중국 악양을 상상하면서 거기에 악양루의 멋진 풍광까지 머릿속에 그리게 되니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하지만, 그건 그때 가봐야 알 일이다. 내비게이션에 악양루를 입력하자 처음 가는 곳에 대한 설렘이 내비게이션까지 전달되었는지 안내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한층 들뜬다.
처음 가는 여행지를 찾아갈 때의 그 설렘과 흥분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을 들뜨게 한다. 들뜬 마음만큼이나 가속페달을 밟는 발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읍내를 빠져나와 얼마나 달렸을까?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다 왔다고 숨 가쁘게 외친다. 그제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변을 살핀다. 그런데 있어야 할 정자는 보이지 않고 웬 식당 건물 앞에 섰다. 식당 건물에 악양루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요즘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이다. 그때와 지금이 또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악양루 간판을 보는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아뿔싸! 또 실수한 건가? 차를 가지고 다닌 세월이 그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방향감각이 없어 그런지 심각한 수준의 길치이다. 여행길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동반자가 내비게이션이다. 내비게이션이 없었으면 여행한다고 지금처럼 전국을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아픈 병도 시간이 지나면 낫는 법인데, 이 길치 병은 고질병이다.
이렇다 보니 여행길은 늘 내비게이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가끔 실수로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다. 내비게이션에서 목적지를 찾으려고 입력하면 같은 이름의 여러 곳이 나올 때가 많다. 습관처럼 아무 생각 없이 맨 위에 나와 있는 곳을 누를 때가 많다. 아주 가끔 가려는 여행지와 이름이 같은 음식점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경우가 있다.
강릉에서 경포대를 가려고 내비게이션에서 찾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에 있는 경포대 횟집으로 가고 있어 황급히 차를 돌린 적이 있다. 지금 상황이 딱 그게 아닌가 싶어 황당하다. 내비게이션은 주어진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눈감고 입을 닫아버렸다.
외진 곳이라 오가는 사람이 없어 물어볼 수도 없다. 정말 실수로 잘못 온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편히 먹어야 한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차를 세운 김에 쉬어갈 생각으로 차에서 내린다. 장시간 운전으로 잔뜩 움츠러든 몸을 풀어주면서 눈은 주변을 살핀다. 그때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악양루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잘못 왔다고 포기하고 있던 차에 발견한 것이라 정말 반가웠다. 천만다행이다 싶어 차에서 얼른 카메라를 꺼내 이정표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물길을 끼고 가는 길에 우뚝 솟은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사찰을 지키는 우락부락한 사대천왕처럼 위압적이다. 사대천왕의 검문을 받고 지나면 이어진 계단 끝에 악양루의 옆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에 가려 있지만, 예사롭지 않은 악양루의 본 모습은 숨겨지지 않는다. 악양루는 제법 가파른 절벽 위에 천연덕스럽게 올라앉아 있다. 하루가 저물어가는 겨울 오후의 붉은 햇살이 악양루를 휘감았다. 오늘 하루 다 소모하지 못한 에너지를 잔뜩 품은 날카롭고 강렬한 햇살이 악양루의 정면을 사정없이 파고든다. 악양루를 부술 듯이 햇살이 쏟아지지만, 악양루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악양루는 생명이 없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고고한 기품을 지닌 선비를 보는 듯하다. 지금의 이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악양루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겨울 분위기가 가득한 주변은 적막하다. 가끔 허공을 가르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정적을 깨뜨린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른다.
악양루는 한정된 공간에 짓다 보니 건물 외에 마땅한 여백이 없다. 그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어쩌겠는가. 악양루에 서서 드넓게 펼쳐진 남강의 경치를 한눈에 담는다. 저물어 가는 해의 붉은 햇살이 남강의 물결을 타고 쏜살같이 달려든다. 그 햇살에 반사된 잔물결은 눈부신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오후의 긴 햇살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남강 옆에 펼쳐진 드넓은 들판까지 덮친다. 이렇게 눈부신 경치가 있어 악양루라고 이름을 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해넘이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눈 앞에 펼쳐지는 경치는 해넘이를 위한 맛보기라고 할 수 있다. 예고편 같은 경치가 이런데 본편의 해넘이 경치가 어떨지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린다. 가슴 벅찬 이 경치를 오롯이 혼자 즐긴다. 오가는 사람이 없어 혼자 떠난 여행의 맛과 멋을 고스란히 가슴에 담는다.
늦은 오후의 겨울바람은 생각보다 매섭다. 사방이 트여 있는 악양루에서 바람을 피할 곳은 없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차가운 바람이 할퀴고 간 얼굴은 개울가의 살얼음처럼 얼어버렸다. 잠시 몸을 피할 곳만 있으면 기다렸다가 해넘이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먼 길을 달려왔는데 악양루가 자랑하는 그 경치를 보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지만, 그때까지 버티는 게 아무래도 무리다.
어쩔 수 없이 해넘이를 포기하고, 절벽 위에 올라앉은 악양루의 정면 모습을 보려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간다. 악양루 맞은편에 있는 둑에서 최대한 가깝게 악양루로 다가간다. 정면에서 보는 악양루의 위치가 생각보다는 높지 않다. 산세는 완만하지만, 온통 크고 작은 바위들로 이루어졌다. 악양루는 사람이 지은 건축물이지만,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남강과 너른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악양루를 짓고 자연을 벗 삼았던 조상들의 풍류가 그저 부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