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리 집 식구들이 제주도로 보름살이를 떠났다. 출산을 앞둔 큰딸이 출산 전에 엄마와 여동생 그리고 어린 조카와 함께 제주 보름살이를 했다. 어려서부터 딸아이들을 다른 건 몰라도 여행은 자주 데리고 다녀서 그런지 우리 식구들은 유난히 여행을 좋아한다.
제주도를 다녀온 지 오래되어서 이참에 가족들이 보름살이하는 곳으로 2박 3일간 짧게 제주를 다녀왔다. 제주를 여러 번 드나들어서 그런지 이젠 보고 싶은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이번 제주 여행은 어디를 보는 것보다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려고 했다.
둘째 날, 아내와 둘째 딸은 손자를 데리고 키즈 카페를 가기로 했다. 그 시간만큼 큰딸과 갈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한번 가본 곳이나, 딱히 취향이 맞지 않는 곳을 빼고 나면 마땅히 갈 곳이 없다. 핸드폰의 화면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갈 만한 곳을 찾다가 ‘한라산 아래 첫마을 고배기 동산’을 발견했다. 한라산 아래 첫마을이라는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던 비밀의 장소라도 발견한 것처럼 기뻤다. 걷는 거라면 누구보다 좋아하는 딸과 의기투합해서 고배기 동산으로 갔다. 도착했을 때의 첫 느낌은 너무 기대를 해서 그랬는지 다소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곧 반전되었고, 그 반전이 다시 또 반전을 일으켰다.
고배기 동산은 제주 4.3사건 당시 사라졌던 광평리 마을을 1955년에 재건하면서 한라산 아래 첫마을 사람들에게 삶의 터를 내어준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만든 숲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고백’이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해서 ‘고백이 동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유와 사연이 어찌 되었든 제주 관광지의 한곳으로 소개되어 있어 잔뜩 기대했었다.
초행길이라 당연히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았다. 목적지에 다 온 것 같은데, 임도로 보이는 좁은 길로 내비게이션은 계속 안내했다. 예전에는 엄마나 아내 같은 여자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했다. 그 때문에, 내비게이션의 여자 성우 말은 언제나 철석같이 믿었다. 그 배경에는 지독한 길치의 애로가 숨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내비게이션을 믿고 가다가 두세 번 크게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그때 오금이 저렸던 생각이 떠올라 가던 길을 멈추고 차를 돌려 나왔다. 어떻게 된 거지? 나도 그렇지만 우리 딸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일단 길가로 나와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는 마을로 차를 몰았다.
그때 딸아이가 “아빠! 입구가 저기네!” 하며 외쳤다. 이미 차는 그곳을 지나쳤기 때문에 나는 보지 못했지만, 눈썰미 좋은 딸 덕분에 고배기 동산 입구를 찾았다. 제주의 관광지로 소개되어 있어 주차장도 있고, 사람도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평범한 시골 마을 길가에 있는 숲에는 고배기 동산 입구를 알려주는 삼각형 지붕의 초록 문이 전부였다.
주차장은 보이지 않았고, 길 건너에 차 한 대 정도 세울 수 있는 공간이 겨우 있을 뿐이었다. 그 공간은 누군가 세워놓은 차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마을에다 차를 세우기 잘한 것 같았다. ‘그나저나 한라산 아래 첫마을 고배기 동산은 어떤 모습일까?’ 잔뜩 부푼 기대감을 안고 조심스럽게 숲 안으로 들어갔다. 고배기 동산에 들어서자마자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야! 이거 제대로 왔구나!’ 싶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늘을 향해 미끈하게 쭉쭉 뻗어 올라간 삼나무들이 가득했다. 그 삼나무들의 멋진 모습을 보는 순간, 마치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마냥 기쁘고 한껏 들떴다. 빽빽하게 들어선 삼나무들이 하늘을 가렸다. 그 때문에 오후의 강렬한 햇살도 숲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밖에서 얼쩡거리기만 했다. 숲속은 어스름한 그늘이 가득해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뜨거운 햇살을 허락하지 않는 삼나무 숲은 바깥과 달리 더위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에 숲속의 습기가 달라붙어 끈적이기는 했지만, 그늘이 있어 금방 잊을 수 있었다. 삼나무숲 사이로 야자 매트가 깔려 있어 걷기가 편했다. 숲속에는 군데군데 쉴 수 있는 그물망 침대가 놓여 있는데, 사용한 흔적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원래 이런 걸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데, 이제 막 고배기 동산에 들어섰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 이용해 보기로 마음먹고 지나쳤다.
삼나무 숲이 얼마나 좋았던지 숲을 보면서도 이 숲이 얼마나 이어질지? 아니면 이것이 끝일지? 하는 걱정과 기대가 교차했다. 나의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는 건 숲길밖에 없다. 결과는 아쉬웠다. 삼나무 숲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멋진 삼나무 숲 경치에 한껏 들뜬 기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삼나무 숲은 끝났다.
삼나무 숲 뒤로는 평범한 숲길이 이어졌다. 이어지는 길은 혼자 걸어야 할 만큼 좁았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풀들이 길을 가리고 있었다. 길옆으로 우거진 나무와 풀들은 사람의 손길을 전혀 타지 않아 무성했다.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은 나무와 풀들이 뒤엉켜 있고, 어둑한 그늘이 내려있어 마치 원시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이 든 건 아무도 없는 숲길이 으슥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얼마 가지 않아 젊은 친구 네 명이 걸어왔다. 고배기 동산 숲길을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듯했다. 고배기 동산 입구 건너편에 세워져 있던 차를 타고 온 친구들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 앞쪽은 어떤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물어볼까? 잠시 망설였다. 인생의 앞날을 미리 알고 있으면, 사는 맛과 재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숲길의 앞쪽 상황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묻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갈수록 제멋대로 자란 풀들이 길을 가리고 있어 걷기가 불편했다. 무더운 날씨에 편한 반바지를 입고 있어 다리를 스치는 풀잎도 영 거추장스러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신경이 쓰인 건 혹시나 뱀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요즘 날씨 탓인지 뱀들이 민가에까지 출몰한다는 뉴스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언제 어디서든 불쑥 뱀이 나타날 것 같았다.
딸아이 생각에 숲 구경은 뒷전이고 발아래만 살피게 되었다. 고배기 동산 숲길은 660m로 그리 길지 않다. 더 걷는다고 해도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게 딱히 있을 것 같지 않아 200m를 남겨 두고 발길을 돌렸다. 딸아이도 숲길에 흥미를 잃었는지 두말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고배기 동산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삼나무 숲이다. 되돌아와서 삼나무 숲속에 있는 그물망 침대에 잠깐 누워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그물망이라 등이 배겼지만, 쉬어가는 여유와 재미를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고배기 동산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곳이었다. 고배기 동산 숲길 중에서 삼나무 숲은 제주에서 평범한 곳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가볼 만 하지 않을까 싶다. 가벼운 책이라도 한 권 가지고 가서 그물망 침대에 누워 읽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런 결정과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