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우리나라 최고 권력의 심장부였다. 그곳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금단의 구역이었다. 그래서 청와대 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또 어떤 모습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청와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부터 2022년 5월 9일까지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되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문재인 대통령까지 12명의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생활했다.
1961년 윤보선 대통령이 ‘경무대’라는 명칭을 ‘청와대’로 바꾸었고, 2022년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기면서 청와대가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청와대가 개방된 것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가보고 싶은 마음을 그동안 꾹 눌러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베일에 싸여 있던 청와대가 전면 개방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입장 인원을 제한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래도 사람들로 북적였을 게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피하고 싶어 애써 모른 척 외면했다.
청와대가 개방된 지 벌써 2년이 다 되었다. 이제는 조금 여유 있게 둘러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사전 예약을 했다. 지하철 경복궁역을 나와 경복궁 돌담을 따라 청와대 쪽으로 걸었다. 한복을 입고 한국의 정취를 즐기며 경복궁 돌담을 걷는 외국 관광객들이 꽤 많이 보였다. 그들 덕분에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 같은 즐거움을 맛보았다.
청와대 앞 효자동 삼거리에는 커다란 분수가 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분수라 무척 반가웠다. 효자동 삼거리 주변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지난날의 추억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다른 때도 그랬겠지만, 70년대에는 이 길에 사복 경찰들이 촘촘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날카로운 눈길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그들의 눈초리가 얼마나 매서웠던지 눈길만 마주쳐도 주눅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보이거나, 큰 가방을 들고 있으면 여지없이 불심검문을 당했다. 그렇다 보니까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이 길을 가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철없던 학창 시절에는 이 길을 가보는 게 스릴을 맛볼 수 있는 재밋거리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몇 번인가 이 길을 가면서 쫄깃한 스릴을 맛보았다. 가방 검사를 당하면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이런 것도 당해봤다는 생각에 우쭐했다. 그랬던 걸 보면 철이 없기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이 길을 누구나 마음 편히 걸을 수 있다. 세월 따라 세상이 변하는 건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와대에 가면 꼭 보고 싶은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청와대 정문이고, 다른 하나는 본관 출입구였다. 이렇게 말하면 ‘엥? 정말?’ 하면서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동안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던 청와대라 궁금하고 보고 싶은 곳이 많았을 텐데, 고작 정문과 본관 출입구가 보고 싶냐고 되물을 수 있다. 그렇지만 청와대 하면 생각나는 게 이 두 곳이다.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간첩 문세광의 총탄에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서거했다. 육영수 여사는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많은 국민이 사랑하고 존경했던 영부인이었다. 그 때문에 총격에 의한 불의의 사망으로 온 국민이 충격을 받았고, 또 슬픔에 빠졌다. 그때 고등학생이어서 그 당시의 일들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당시의 기억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육영수 여사를 태운 영구차가 청와대를 떠날 때, 정문을 붙잡고 눈물을 삼키던 박 대통령의 모습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박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인 공과나 역사적인 평가를 떠나 한 남자이자 남편으로서 사랑하는 부인을 떠나보내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정문이 보고 싶었다.
철문의 정문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철문에는 대통령의 봉황 휘장이 장식되어 있다. 황금빛 봉황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고, 그 아래에 무궁화꽃이 장식되어 있다. 그 문을 붙잡고 슬픔을 삭히던 한 남자의 흔적은 지워졌지만, 안타까운 역사의 한순간은 그대로 배어 있다.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그 사건은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고, 그 역사는 세월의 수렁 속에 가라앉아 있다.
무더운 날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를 찾은 사람들은 많았다. 내국인도 많았지만, 외국인 단체관광객이 많아 놀라웠다. 청와대가 개방된 지 2년이 지나 이젠 사람들이 조금 줄지 않았을까? 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청와대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지만, 들어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들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을 해서 그런지 입장은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정문을 지나 청와대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대정원과 그 뒤로 웅장하게 서 있는 본관 건물이었다. 보고 싶었던 본관 입구가 있는 건물이라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본관 입구는 TV를 통해 가끔 보았던 곳이라 실제 모습과 분위기가 어떨지 궁금했다.
본관 입구는 외국 정상이나 외교 사절이 청와대를 방문할 때 가끔 TV에 나왔다. 외국 정상을 태운 차가 미끄러지듯이 들어와 본관 입구에 서는 장면이 뉴스를 통해 나왔다. 청와대를 찾은 사람들은 다른 곳보다 본관 내부를 먼저 보려고 빨려 들어가듯이 본관으로 들어갔다. 그들과 달리 나는 본관 입구에서 이쪽과 저쪽을 옮겨 다니며 유심히 입구를 살폈다. 마치 오래전에 아무도 모르게 숨겨 놓은 보물이라도 찾듯이 말이다.
궁금한 만큼 기대가 컸지만, 사실 본관 입구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아니 있을 수가 없다. 누구도 섣불리 드나들 수 없는 금단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여서 특별하게 생각되었을 뿐이었다. 본관 입구를 보면서 특별한 게 있을 수 없는 정문과 이곳이 왜 보고 싶었는지 스스로에게 궁금했다.
그동안 청와대 내부를 상세하게 공개하거나 보도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 보니까 일반인들은 청와대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니까 보고 싶은 게 있을 수 없다. 눈에 익고 특별한 사건의 장면이었던 곳은 기억에 남아 있어서 그나마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본관 내부는 잠시 미루어 두고 다른 곳을 먼저 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발걸음이 향한 곳은 대통령 가족이 살았던 관저다. 한옥으로 지어진 관저는 청와대에 걸맞은 규모로 우리 한옥의 멋스러움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실내는 현대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건물 내부는 최고 권력자가 살았던 곳이기에 화려할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생각처럼 그렇지는 않았다. 화려하기보다는 단아하고 품위있게 보였다.
관저 정문 맞은 편에 있는 산에는 ‘오운정’과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정자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까 오운정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무더운 날씨에 이정표에 나와 있는 곳까지 올라갈 생각을 하니까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정표 앞에서 몇 번을 망설이다가 관저 앞에서 근무하는 안내자에게 갔다. “오운정까지 얼마나 올라가야 하나요? 올라가는 길이 가파른가요?“ ”십여 분 정도 올라가야 하는데, 오르막길이긴 해도 가볼 만한 합니다.”
이정표에 있는 거리에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십여 분 걸린다는 소리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계단을 오를수록 궁금증은 커졌다. 특별한 공간인 청와대에 있는 정자이다 보니까 어떤 모습과 경치를 품었을지 정말 궁금했다. 대부분 정자는 정자만의 멋진 경치를 품고 있어 오운정은 얼마나 멋진 경치를 보여줄지 잔뜩 기대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기대는 빗나갔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오운정은 ‘오색구름이 드리운 풍광이 신선이 노는 곳과 같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의미와 달리 오운정은 나무숲에 갇혀 있어 답답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되었다.
청와대는 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보안과 경호가 필요한 공간이었다. 아무리 정자가 있다고 해도 이렇게 중요한 공간을 훤히 드러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까 오운정은 어쩔 수 없이 나무에 둘러싸여 있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제는 청와대가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참에 오운정 주변을 정리해서 청와대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오운정은 정자 본래의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어 청와대의 명소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오운정까지 온 김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을 보러 갔다. 보물로 지정된 석불은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 특징을 가졌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경주에서 서울로 옮겨진 석불에 대한 설명문을 읽고 나면 왠지 모르게 경주 석굴암의 석불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석불은 세상을 지그시 굽어보고 있다. 한때 최고 권력자가 머물던 청와대를 굽어보는 것인지 중생들이 살아가는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평온한 석불의 모습에서 이제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청와대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겹쳐 보였다.
청와대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넓고 그만큼 건물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끈 건 현대식 건물보다 우리의 옛 건축물이었다. 관저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침류각’이 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침류각은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라는 뜻이다. 나무숲에 둘러싸여 있는 침류각은 한옥의 멋과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청와대의 여느 현대식 건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고함과 함께 절제된 화려함이 엿보였다. 연회를 베풀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 나름의 화려함을 보태놓지 않았을까? 특히 기하학적인 정교한 모양의 문살이 침류각에 그런 모양과 분위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침류각 월대 한쪽 끝에는 청동으로 만든 ‘드므’가 자리 잡고 있다. 침류각 목재의 짙은 갈색과는 달리 푸르스름한 색이라 드므는 도드라지게 눈에 띄었다.
독특한 이름의 드므는 방화수를 담아놓는 솥이다. 우리의 옛 건축물은 목재라서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만약을 대비해서 건물에 이런 드므를 놓아둔 건 우리 선조들의 삶의 지혜다. 이제는 딱히 할 일이 없어 장식품으로 남았지만, 특별한 의미와 가치가 있어 건물에 아름다움과 특별함을 보태고 있다.
속속들이 다 보지는 못했지만, 구경하고 싶은 곳은 다 둘러본 다음에 본관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제법 지나서인지 처음 올 때보다는 사람들이 꽤 줄어 있었다. 본관은 대통령이 국정을 수행하던 중추적인 장소로 국내 인사와 함께 외국의 국빈이나 외교 사절을 맞이하던 곳이다. 중앙의 본체와 함께 좌우에 별채가 있고, 다 알다시피 팔작지붕에 한옥 청기와를 올렸다.
본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건 이층으로 올라가는 크고 넓은 중앙 계단이었다. 이곳은 포토 존이라 계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본관에는 대통령 집무실을 비롯해 영부인이 사용했던 무궁화실 등 다양한 용도의 공간이 있다.
대통령이 사용했던 공간이고, 국빈들이 찾는 곳이라 내부가 엄청 화려할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보니까 생각했던 것처럼 화려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천장에 매달린 많은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보였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눈에는 나라의 품위와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을 정도의 절제된 모습이면서도 진중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별채 세종실에는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한때 청와대의 주인이었고, 이 나라를 움직였던 분들이다. 그분들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몫이자 역사의 몫이다. 개인적으로는 퇴임한 대통령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대통령이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을 지냈기 때문에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