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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Oct 07. 2024

화려한 저녁노을을 보기 위해 다시 정서진에 가야 한다

“해가 떠오르는 곳은 동쪽이다. 해가 지는 쪽은 서쪽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동쪽이고,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서쪽일까? 누구에게나 묻게 되면 머뭇거리며 대답을 망설인다. 이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동서남북의 중앙에 서 있는 바로 나, 나 자신의 위치로부터 동쪽과 서쪽이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 (중략) 나는 세상의 어느 곳에 서 있어도 동서남북의 중심, 가운데의 주인공인 셈이다.“


향봉 스님이 쓴 ”산골 노승의 화려한 점심“에 나오는 글귀다. 얼핏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은데,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살면서 세상이 정해놓은 대로 이쪽은 동쪽이요, 저쪽은 서쪽으로만 생각했지, 동쪽과 서쪽이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인지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세상을 사는 데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고, 굳이 또 그걸 따질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 개개인이 바로 동서남북의 중심이라는 말은 가슴에 와닿았고, 속이 뻥 뚫리듯이 시원했다.


강릉 정동진은 서너 번 이상 가봤다. 정동진의 대칭이라고 할 수 있는 정서진은 강릉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가보질 못했다. 사실 가보기 전에는 가봐야 그게 그거지 정서진이라고 뭐 특별할 게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여행을 좋아하니까 언젠가 한 번은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동안 오랫동안 전국을 여행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여행지에 대한 취향이 다르다. 내 경우는 아름다운 자연이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을 좋아한다.


전국을 속속들이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보고 싶은 곳은 어느 정도는 다 가보았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계절마다 보여주는 경치가 다르다. 어디라도 사계절의 경치를 다 보아야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번 가본 곳은 왠지 모르게 다시 가지지 않는다. 안가는 것인지 못 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보니까 요즘은 어디를 가려고 하면 여행지를 고르는 게 일이다.



오랜만에 인천을 가보기로 했다. 어디를 갈까? 이런저런 곳을 찾다가 기억에서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정서진이 불쑥 떠올랐다. ‘오! 그래! 이참에 한번 가보자!” 마치 깜박 잊고 있던 숙제를 뒤늦게 알아챈 것처럼 이것저것 생각할 거 없이 정서진을 여행코스에 넣었다. 여행의 동반자인 내비게이션에 정서진을 입력하고 기분 좋게 달려갔다. 


시간은 9월의 막바지로 달려가는데, 날씨는 한여름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다. 그래도 높고 파란 하늘에 펼쳐진 갖가지 모양의 하얀 구름을 보면 제아무리 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가을이 올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도착한 정서진에서는 주변의 멋진 건물들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유달리 높고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는 아라인천여객터미널과 아라타워가 현대적 감각과 멋스러움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이 건물들이 정서진의 볼거리를 조금 더 풍성하게 해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정서진에 도착한 게 이른 오후여서 노을 구경은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정서진에 왔으면 해넘이를 보아야 제멋인 것을 알기에 아쉬움이 없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정 때문에 노을 구경은 포기했지만, 정서진 수상 무대에서 바라보는 풍력발전기의 거대한 바람개비와 하늘의 펼쳐진 구름 경치가 있어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대지는 아직 뜨겁게 타고 있는 여름이지만, 적어도 하늘만큼은 이미 가을이 점령한 것처럼 보였다. 동심으로 돌아가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았고, 그 하늘 경치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연발했다. 



정서진의 상징물은 ’노을 종’이다. 노을 종은 속이 비어 있는 둥근 모양이다. 그것이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알지 못해 궁금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새의 알을 표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까 서해안의 밀물과 썰물이 만들어 낸 조약돌을 나타낸 것이었다. 


노을 종으로 다가가는 데, 여성분의 멋진 노랫소리가 들렸다. 성악 하시는 분으로 보였는데. 속으로 ‘정서진에 온 것을 이렇게 환영해 주는 건가?’ 하면서 즐거운 착각에 빠졌다. 노랫소리에 끌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노을 종은 정서진의 상징물답게 크고 웅장했다. 높이가 몇m이고, 폭이 몇m인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뻥 뚫려 있는 가운데에서 여자분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을 종의 생김새 때문이지 노랫소리가 듣기 좋게 울려 퍼졌다. 버스킹이었으면 제대로 자리 잡고 들었겠지만, 연습 중인 것 같아 방해되지 않게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노을 종 앞에는 귀엽고 작은 종들이 달린 노을 벽이 있다. 사랑, 행복, 소망, 설레임, 우정, 낭만을 주제로 노을 벽에 종을 매달아 치유와 위안을 기원할 수 있도록 구성한 벽이라고 한다. 노을 벽 앞에는 이곳이 정서진임을 알려주는 정서진 표지석도 있다. 


정서진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서진은 광화문을 기점으로 서쪽 육지가 끝나는 나루터이다. 정서진은 원래 강화도에 있었는데, 인천시는 정서진의 위치를 새로 정하기로 하고 경인 아라뱃길이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정서진을 정했다고 한다.



바다 쪽으로 가면 드넓은 갯벌과 함께 저 멀리 영종대교가 아스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이 끝없이 펼쳐졌다. 갯벌 사이에 S자로 부드럽게 휘어진 갯골을 흐르는 바닷물이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경치는 서해만의 아름다운 경치이다. 


때가 되면 저 갯벌 너머로 하루를 마감하는 해가 질 것이다. 이렇게 가을이 오고 있는 계절에는 저녁노을이 정말 장관이다. 어떻게 그렇게 장엄하면서도 화려한 경치를 펼쳐놓을 수 있는지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정동진의 일출이 새로운 희망을 의미한다면 정서진의 일몰은 낭만, 그리움, 회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일몰에는 분명 그런 의미가 있겠지만, 나는 다른 생각도 한다. 해가 지고, 하루가 저물어 가는 건 우리의 인생으로 보면 노년의 삶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그려낼 수 없는 가을날의 노을은 세상의 희로애락을 모두 겪은 노년 삶의 순간처럼 여겨진다. 



그렇기에 노년에 접어들면 저녁노을처럼 인생의 꽃을 더없이 화려하게 피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정서진에는 초대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어령 선생의 “정서진 노을 종소리”라는 시가 있다. 그 시 중에서 “너무 가까워 노을빛이 내 심장의 피가 됩니다”라는 구절이 유독 가슴에 와닿는다. 이 가을, 정서진에 다시 가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다. 그것도 장엄한 노을이 시작되는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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