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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Nov 09. 2024

경의선 숲길은 바쁜 일상의 쉼표를 찍을 수 있는 곳이다


가을의 교향곡을 연주하기 위한 무대는 조심스럽게 바쁘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자리를 잡고 각자의 악기를 조율하며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무대 분위기는 살짝 들떠 있으면서도 알게 모르게 긴장감이 흐른다.

이제 막 가을이 시작된 경의선 숲길은 마치 연주를 준비하는 무대처럼 느껴졌다. 경의선 숲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복장에서 이미 가을은 왔다. 경의선 숲길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시작된 가을을 만나는 설렘과 함께 정말 가을이 온 건가? 하는 의구심이 기분 좋은 긴장감에 들게 했다.

 

높고 푸른 하늘과 주변의 나무들을 보면 가을이 우리 옆에 와있다는 걸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다. 아직은 초록이 가득하지만, 서둘러 노랗고 불그스레 물든 나뭇잎이 초록 속에서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파란 하늘에 막혀 살포시 고개 숙인 은빛의 억새는 이제 가을이 왔다는 걸 온몸으로 알려준다. 가을은 울긋불긋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은 때도 좋지만, 이렇게 가을로 가는 길목에서 기대와 설렘으로 맞는 가을도 그에 못지않은 즐거움이다. 


주말의 경의선 숲길은 그 명성만큼이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곳은 계절을 막론하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서울 명소 중의 한 곳이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많지만, 젊잖은 중년의 사람들도 꽤 많이 이곳을 찾는다. 이제 경의선 숲길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경의선은 원래 서울역과 신의주역을 연결하는 철도였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이제 경의선은 서울역에서 문산역까지만 오간다. 지상으로 운행되던 경의선이 2005년 지하화되면서 지상부의 폐철로를 걷어내고 경의선 숲길이 조성되었다. 경의선 숲길은 용산문화센터에서 마포구 수색역까지 8.5km에 걸쳐 조성되었다. 



이번에는 그 긴 구간 중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 ‘연트럴 파크’라고 불리는 연남동 구간과 함께 와우교 구간을 걷기로 했다. 경의선 숲길에 들어서기 전, 전철역 주변의 활기찬 거리 모습에 먼저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언제인가부터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은 잘 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젊음의 열기와 활기가 넘치는 거리에는 거리낌 없이 자석에 끌리듯이 끌려 들어갔다. 거리의 모습과 분위기는 이것저것 길게 이야기할 거 없이 한마디로 좋았다. 길가에 늘어선 각종 상점과 한껏 들뜬 얼굴로 길을 걷는 젊은이들을 보면 “좋을 때다!” 하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이렇게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게 전혀 싫지 않았다. 그 덕분에 기분은 한껏 들떴고 발걸음은 마냥 가벼웠다. 


‘오기를 잘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함께 한 지인들과 경의선 숲길에 들어섰다. 먼저 땡땡거리라고 부르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숲길에는 경의선 열차가 쉴 새 없이 달렸던 철로의 레일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고 보니까 이렇게 가까이에서 레일을 보는 것도 꽤 오랜만이다. 


여행할 때, 주로 자동차를 이용한다.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자동차를 이용하다 보니까 버스나 기차 타고 여행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어쩌다 기차를 타도 고속열차가 달리는 철로를 보면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이름 모를 간이역에서 보는 철로가 왠지 정겹고, 내 삶 속의 녹아 있던 추억을 되살려 준다.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는 같은 나이의 친구가 대여섯 명 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동네 개구쟁이들은 중대한 거사를 치르기 위해 부모님 몰래 동네를 벗어났다. 주머니에는 꼬맹이들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대못이 서너 개씩 들어있었다. 우리가 사는 전농동에서 기차가 지나가는 청량리역 주변 마을까지는 꽤 멀었는데, 그 길을 의기양양하게 걸어서 갔다. 미리 알아둔 동네에 도착하면 마치 전쟁 영화의 한 장면처럼 철로 가까이에서 몸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면, 대못을 꺼내 레일 위에 드문드문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재빨리 다시 몸을 숨기고 이제나저제나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기차가 지나가면 레일 위의 대못은 납작하게 찌부러졌다. 그 못을 나무에 박아 끼우면 겨울에 썰매 탈 때, 훌륭한 썰매 지팡이가 되었다. 그때 함께 거사를 치렀던 친구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릴 때 함께 했던 친구들은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경의선 레일의 한 부분처럼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도심 속의 숲길이라 나무가 있으면 얼마나 있을까? 했는데,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나무들이 많아 보기 좋았고, 그만큼 걷는 즐거움도 컸다. 뜨거운 여름을 온몸으로 막아섰던 초록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가을 햇살은 숲길을 걷는 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가을이 시작되는 날의 숲길을 걷는 사람들의 마음은 같을 수밖에 없다. 함께한 지인들은 물론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가을 햇살만큼이나 다들 밝았다. 


숲길에는 이제 추억 속에만 남아 있는 철도 건널목을 재현해 놓았다. 아직도 전국 곳곳에 철도 건널목이 남아 있지만, 거의 볼 일이 없어 이젠 기억 속에만 머물고 있다. 지나간 삶의 순간들을 만나면 왜 그렇게 마음이 따스해지는지 모른다. 세월이 흐르면 기억력은 어쩔 수 없이 쇠퇴할 수밖에 없는데도,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재생되는 게 참으로 신기하다. 


예전에는 여기저기서 철도 건널목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기차가 지나갈 때쯤이면 역무원이 나와 건널목의 기다란 차단봉을 내려 오가는 사람들과 차량을 막았다. 그때부터 어디서 나는지는 모르지만, 다급하게 땡! 땡! 거리는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렸다. 조금은 경박스럽게 울렸던 그 소리는 기차가 철도 건널목을 지나가고 나면 멈추었다. 기차가 지나가고 건널목 차단봉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람과 차들이 건널목을 지나다녔다.



갔던 길을 되돌아와 홍대입구역으로 연남동 구간으로 들어가면 조금 전과는 같은 듯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연남동 구간에는 키 큰 나무들이 더 많아 보였고, 숲길을 걷는 사람들도 훨씬 더 많았다. 걷는 길을 따라 맑은 도랑물이 흐르고 있어 재미와 즐거움이 더 커졌다. 이 때문인지 유난히 젊은 연인들이 많이 보였다. 


도시의 아파트가 길게 늘어진 가을 햇살을 막아 어스름한 그늘이 드리웠다. 가을 분위기를 한껏 느끼게 하는 은빛의 억새와 수크령이 있고, 제법 넓은 잔디밭도 펼쳐졌다. 어찌 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경치인데도, 이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진 경의선 숲길에서는 왠지 모르게 색다르게 여겨졌다. 마치 외국의 어느 공원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경의선 숲길은 삭막한 도심 속에서 자연이 되살아난 특별한 공간이었다. 


쓸모가 없어진 철길을 걷어내고 이렇게 공원으로 만들 아이디어를 누가 냈는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 이런 녹색의 공간이 있어 잠시나마 여유와 평온을 즐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경의선 숲길은 바쁘디바쁜 일상에서 잠시 쉼표를 찍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경의선 숲길에는 외국인도 꽤 많이 보였다. 그들에게 우리나라의 멋진 가을 경치를 보여주는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우쭐했다. 그러면서도 아쉬웠던 건 그들이 제대로 단풍이 들었을 때,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들만이 아니라, 나 역시도 단풍 물든 날의 경의선 숲길이 보고 싶었다. 그때는 경의선 숲길이 어떤 모습과 분위기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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