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믿는 종교가 있는 건 아니다. 돌아가신 어머니 덕분에 그래도 심정적으로 가까운 종교는 불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어디 정해 놓고 다니는 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말마다 열심히 절에 가지도 않는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주로 여행하면서 그 지역에 있는 사찰을 둘러보는 정도다. 종교에 대해서는 얼치기이지만 나름의 지론은 가지고 있다.
어느 종교를 믿던 진정한 종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은 불교, 가톨릭, 기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다. 절이나 성당이나 교회에 열심히 나가도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지 못하면 무늬만 종교인이지 진정한 종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면 우리나라의 3대 종교와 다 인연이 있다. 코흘리개 꼬맹이 때는 교회에 자주 갔고, 교회에 얽힌 추억도 많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60년대는 너나 할 거 없이 살기가 어려웠다. 그 시절은 설탕처럼 달콤한 먹거리가 정말 귀했다. 설탕이 흔해 빠진 요즘을 사는 사람들이 들으면 믿지 않겠지만, 그 시절에는 명절의 최고 선물이 설탕이었다. 그만큼 설탕이 귀했고, 일상에서 먹기가 쉽지 않았다.
그랬던 시절에 자그마한 교회가 윗동네에 생겼다. 주말이 되면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교회로 몰려갔다. 교회에서는 아이들에게 먹기 쉽지 않은 설탕물이나 주스 물과 사탕 등을 나누어 주었으니, 꼬맹이들에게는 천국이 따로 없었다. 때때로 학용품도 나누어 주었는데, 어찌 보면 나라에서도 하지 못한 일을 교회가 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아래 동네에는 일대에서 제일 큰 교회가 있었다. 교회 이름이 성덕 교회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동네 개구쟁이들에게 그 교회는 또 다른 놀이터였다. 친구들과 다방구 놀이를 하다가 술래한테 잡히지 않으려고 한창 예배 중인 교회 안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목사님은 그런 개구쟁이들의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하셨다.
그 교회에는 높은 종루에 종이 매달려 있었다. 종을 잡아당기는 굵고 긴 줄은 언제나 종루 한쪽에 붙들어 매어져 있었다. 이것도 역시 개구쟁이들에게는 좋은 놀이 먹잇감이었다. 교회에서 생활하시는 연세 드신 아저씨 몰래 종을 치고는 잽싸게 달아났다. 그러고는 무슨 큰일이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동네로 돌아왔다. 운이 좋았던 건지 아저씨가 알면서도 모른척하셨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도 붙잡히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저씨가 눈감아 주셨던 게 아닐까 싶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종로구에 있는 조계사와 성북구에 있는 보문사에 주로 다니셨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전국의 사찰을 여행 삼아 다니셨다. 그렇다 보니까 어려서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절에 많이 갔다. 사실 어렸을 때는 절에 가는 게 정말 싫었다. 다른 게 아니라, 사찰 입구에 있는 우락부락한 사천왕이 어렸을 때는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나이를 먹어서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절에 갈 일이 더러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나마 불교가 친숙하게 여겨진다. 그동안 여행하면서 꽤 많은 사찰을 가봤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행지로 산사만 한 곳이 없다. 고즈넉한 산사는 언제 어느 때 찾아도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고요한 산사에서 차분하게 시간을 보내면 몸과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다.
가톨릭과의 인연도 빠뜨릴 수 없다. 결혼 전, 아내는 가톨릭 신자였고, 처가 식구들 대부분이 가톨릭을 믿었다. 그래서 결혼할 때, 아내가 다니던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올렸다. 그러니 이보다 더 깊은 인연이 어디 있겠는가. 그때 성당에서 올렸던 혼배성사는 예식장에서 했던 결혼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았고, 더 많은 의미와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혼배성사가 끝나고 신부님, 대부, 대모님과 함께 포장마차에서 벌렸던 조촐한 피로연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따스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돌아가신 장인, 장모님은 흑석동 성당 납골당에 모셔져 있다. 자주는 아니어도 생각날 때마다 아내와 함께 성당을 찾는다. 가톨릭과의 인연은 이렇게 죽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거다. 여행하면서 가톨릭 성당과 성지도 몇 군데 가보았다. 차분하면서도 경건한 분위기의 그곳들은 산사만큼이나 여행자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이곳저곳 가본 성당 중의 한 곳이 강화도에 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다. 이번에 다시 찾기 전까지 이미 서너 번을 가보았던 곳이다. 그 이후로 강화도를 몇 번 다녀왔지만, 강화성당을 찾지 않아 무척 오랜만에 다시 강화성당을 보게 되었다. 이번에 강화성당을 찾은 건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이전에 갔을 때는 성당 문이 늘 잠겨 있어 한 번도 성당 내부를 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성당 문이 열려 있어 처음으로 성당 내부를 보게 되었다. 그 덕분에 이전과는 다른 강화성당에 대한 멋진 추억을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강화성당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옥 성당이다. 이 때문에 강화성당은 교인들만을 위한 성당이 아니고, 이젠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의 성당이다.
강화성당의 외부는 전통 한옥 양식이지만, 내부는 기독교 바실리카 양식으로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역사성과 희귀성 그리고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어 볼 때마다 보는 즐거움이 여간 아니다. 그 때문에 강화도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찾게 되는 강화의 명소이다.
강화성당은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멋스러움을 진하게 풍긴다. 석축과 함께 경사진 돌계단 위에 날아갈 듯이 서있는 출입문은 강화성당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려 준다. 제법 높은 곳에서 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문은 날렵한 모습과 함께 나름의 위엄을 품고 있다. 위엄스럽다고 해서 보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짓누르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움 속의 은근한 위엄이 서려 있다.
출입문을 지나면 왼쪽에 있는 종각에 커다란 종이 매달려 있다. 처음 그 종을 보았을 때는 사실 의아스러웠다. ‘아니? 사찰에 있는 종이 여기에 왜 있지?’ 종의 장식 무늬는 다르지만, 전체적인 모습이 사찰에서 보았던 종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성당이나 교회의 종이라고 하면 높은 종루에 매달려 있는 그런 종만 알고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성공회가 낯선 땅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한 현지화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주성전(天主聖殿) 현판이 걸린 강화성당 건물은 볼 때마다 새롭고 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분명 한옥 양식인데도 기존 한옥 양식과는 어딘지 모르게 같은 듯 다른 느낌이 든다. 이층 형태로 되어 있어 웅장함과 함께 낯익은 친근함이 강화성당의 특별한 매력이다. 강화성당을 보면 우리의 전통 건축미에다 현대적인 감각과 디자인을 보태서 우리만의 멋스러운 건축물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당의 돌계단을 올라가면서도 성당 내부를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이전처럼 건물 외관만 보겠거니 했는데, 뜻밖에 행운이 찾아왔다. 먼저 온 사람들이 성당에 드나드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주말이라 예배보는 시간인가 했는데, 성당 안은 구경하는 사람들만 있었다. ‘이게 웬 떡이냐!’ 하는 반가운 마음으로 서둘러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왔던 사람들이 빠져나간 성당 안은 조용했고, 경건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성당 내부를 본 첫 느낌은 생뚱맞게 귀여웠다. 그건 성당 안에 놓여 있는 자그마한 나무 의자들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사용했던 것 같은 나무 의자는 작고 앙증스러웠다. 기억에서 잠시 지워져 있던 어릴 때의 추억 물건을 보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성당 내부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야말로 건물 규모에 어울리는 적당한 크기였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니까 그렇지 그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엄청나게 큰 건물이었을 것이다. 찬찬히 내부를 둘러보면 정갈함과 함께 은근한 화려함이 엿보였다. 서양식과 우리의 전통적인 건축 요소가 어우러져서 그런 멋스러움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창문으로 밝은 가을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성당 내부는 은은했다. 산사에 가면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아 여유롭게 쉴 때가 많다. 그런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느껴보고 싶어 앙증맞은 나무 의자에 앉았다. 행여 부서지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앉았다. 신체의 일부인 엉덩이와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나무 의자와의 만남은 특별했다. 생각했던 것처럼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졌다. 강화성당에서의 새로운 추억이 이렇게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