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 동네가 여전히 눈에 삼삼하다. 지금의 서울은 온통 아파트 천지지만, 그때는 다들 고만고만한 주택들이었다. 동네 입구에는 어른부터 아이까지 이용하는 가게가 하나 있었고. 가게 앞에서 길이 세 갈래로 나누어졌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동네를 기준으로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구분했다. 우리 동네는 삼거리에서 왼쪽 아래에 있었다.
동네는 제법 큰 골목을 따라 집들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큰 골목에서 새끼 친 작은 골목이 양옆으로 두세 군데씩 있었는데, 골목 안까지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동네 개구쟁이들은 그 작은 골목을 골대 삼아 축구 시합을 했었다. 동네 뒤쪽에는 병풍을 두른 듯 배봉산이 동네를 감쌌다. 변변한 놀이터가 없던 그 시절, 배봉산은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이터여서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렸다.
산 중턱에는 코끼리 바위라고 부르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서는 우리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고, 동네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였다. 정신없이 놀다가 해 질 무렵, 코끼리 바위에 앉아 친구들과 자주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만큼은 천방지축 개구쟁이들이 다들 말없이 물끄러미 동네를 바라보았다. 그땐 몰랐지만, 그렇게 동네가 가슴속에 단단히 둥지를 틀었다.
어릴 때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우리 동네도 개발의 바람은 피해 가지 못했다. 결혼해 분가하면서 동네를 떠났고, 그 후 우리 동네는 재개발이 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영원히 잊지 못할 아니 잊을 수 없는 추억이 가득한 우리 동네에는 번드레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나와 우리 가족의 지난날을 죄다 삼켜버린 아파트가 좋게 보이지 않았다.
가끔은 우리 동네가 그대로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리우면 선산이나 위패 모신 곳을 찾아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다독일 수 있다. 그것처럼 고향이나 다를 바 없는 어린 시절의 동네를 찾으면 지치고 힘든 마음을 보듬어주고 또 위로해 주었을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실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혼자 꿈꿔보는 그 따스한 바람을 현실의 순간이 무참히 깨뜨려 버릴 때는 마음이 아리다. 까진 상처에 소독약을 바를 때의 그 찌르르한 강렬한 아픔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여행하면서 옛 모습을 볼 수 있는 데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곳에서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의 시간이나, 살아보지 못한 상상 속의 세월 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순천을 대표하는 여행지 중의 한 곳이 낙안읍성이다. 낙안읍성은 세월 저 편의 옛 모습을 실감 나게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누구의 소행인지 아니면 누구의 실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낙안읍성은 조선시대에서 시간이 멈추었다.
조선의 600년 세월이 가두어진 낙안읍성은 직접 보지 못했고, 또 가볼 수 없는 역사 속의 마을이다. 낙안읍성은 영화세트장처럼 속 빈 강정처럼 서 있는 게 아니라, 지금도 100여 명의 주민이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계획도시인 낙안읍성에는 옛 모습 그대로의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겨울 추위가 잠시 주춤한 날, 낙안읍성을 찾았다. 아마도 이번이 서너 번째가 아닌가 싶다. 낙안읍성에 갇혀 있는 세월의 무게가 커서 그런지 낙안읍성에 대한 기억은 하나밖에 없다. 만화영화 개구쟁이 스머프 들의 송이 집을 떠올리게 하는 초가집 경치만 생각난다. 이건 기억력을 탓하기 전에 이 경치야말로 낙안읍성만의 경치이자 최고의 경치이기 때문이다.
낙안읍성의 동문인 낙풍루를 지나 낙안읍성으로 들어갔다. 추운 날씨가 잠깐 주춤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겨울날의 매콤함이 여전해서 그런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덕분에 넓은 낙안읍성을 독차지하고 느긋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세상의 만물들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계절이라 눈에 들어오는 경치에서도 계절의 차가움과 쓸쓸함이 느껴졌다. 그나마 따사롭게 쏟아지는 밝은 햇살이 있어 그 차가움과 쓸쓸함을 덜어낼 수 있었다.
동문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큰길을 따라 가면서 중간중간에 나 있는 골목길을 들락거리며 낙안읍성을 둘러보았다. 큰길을 가운데에 두고 오른쪽에는 객사와 동헌, 낙민루 등 규모 있는 관아 건물이 있고, 맞은 편에는 서민들이 살아가는 초가집들이 정겹게 모여 있다. 이러한 건물 배치를 보면 그 시대의 계획도시였다는 게 느껴진다.
많은 건물이 있지만, 그래도 나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건 역시 초가집이다. 객사와 누각, 동헌 같은 건축물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렇게 많은 초가집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경치는 보기 어렵다. 요즘 사람들은 보지 못했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시골에 초가집이 흔했다. 그때의 기억을 아직 잊지 않고 있어서 초가집을 보는 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시골의 옛 친척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먼저 말했듯이 낙안읍성 초가집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초가집에는 일상의 물품들이 놓여 있어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사람이 사니까 그나마 집안은 조금 편하게 개조했는지 모르겠지만, 초가집 외부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불편을 감수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초가집을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흙 돌담이 있어 더욱더 목가적이고 서정적으로 보였다.
낙안읍성에서는 그 시대의 옛 모습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전통 생활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것도 많다. 이번에는 시간이 맞지 않아 해보지 못했지만, 그런 체험을 하면 낙안읍성으로의 여행이 더욱 알차고 풍성해질 게 분명하다. 낙안읍성의 여러 프로그램 중에서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 공연은 정말이지 꼭 한번 보고 싶다. 낙안읍성에서 보는 전통 공연은 훨씬 더 즐겁고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흙 돌담길을 걷다 보면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TV 사극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 시대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어땠을지 정말 궁금하다. 우리의 조상들이지만, 외국인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을 보면 조선시대 후기의 사람인데도 지금의 우리와 같은 듯 달리 보인다.
그동안 우리의 삶이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게 변했다. 그런 삶의 변화들이 우리의 체형과 얼굴을 변화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규모가 크고 실제에 가까운 낙안읍성을 보면 상상의 나래가 저절로 펼쳐진다. 오가는 사람이 없는 낙안읍성 골목길을 걸으면 마치 영화나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뜻하지 않은 일로 과거 시대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골목 귀퉁이에서 까무잡잡한 얼굴에 흙이 잔뜩 묻은 바지저고리를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튀어나와 까르르 웃어댈 것 같았다. 낙안읍성을 둘러보면서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상상의 장면을 떠올리는 게 이곳을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돌아 보고 나서 성벽 위로 올라갔다. 어렸을 때, 동네 뒷산 코끼리 바위에서 우리 동네를 내려다보듯이 낙안읍성을 한눈에 담고 싶었다.
낙안읍성의 초가집들이 오순도순 어깨를 맞대고 있는 경치는 신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요즘 보기 어려운 그 경치는 가슴을 따스하고 포근하게 해준다. 오랜만에 보는 초가집의 정겨운 모습은 물론 둥그스름한 초가지붕의 곡선이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잠시 쉬어갈 줄 모르는 멋대가리 없는 시간이 어쩌다 낙안읍성에서는 태평스럽게 널브러져 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