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가 들려주는 동화
나는 이제 곧 열 살이 된다. 혼자서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다. 엄마는 집에 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 보통의 아홉 살이 할 수 있는 것 말고도 뭐든 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나는 일곱 살 때부터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여 컵라면을 먹고 즉석밥도 데워먹을 줄 알았다. 어린이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면 혼자 어린이집에 갔고 혼자서 머리도 감았다. 지금은 목욕 의자 위에 서서 설거지도 하고 청소기도 돌린다.
나는 엄마에게 혼자서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다. 엄마를 얼마나 잘 도울 수 있는지 말하고 싶다. 산타할아버지가 어마어마한 선물을 줄 수 있을 만큼 착한 아이라는 걸 엄마가 알게 하고 싶다.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엄마는 나와 함께 있지 않으려 한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예전처럼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고 웃지도 않는다.
시리얼을 다 먹고 이를 닦고 나오니 아빠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아빠 오늘은 일하러 안 가?”
“오후에 갈 거야. 은수야, 오늘은 아빠가 학교에 데려다줄게.”
“학교에? 왜? 나 혼자 갈 수 있는데?”
“아빠가 한 번도 은수 학교 못 가봐서 같이 가 보려고.”
“응”
아빠가 내 겉옷을 입혀 주고 가방을 어깨에 메어줬다. 일요일도 아닌데 아빠가 집에 와서는 나랑 학교에 같이 간다고 하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이상했다. 어린이집 다닐 때도 아빠가 데려다준 적 없었다. 그런데 아빠 손을 잡고 걸으니 자꾸 달리고 싶었다.
“아빠, 있잖아. 아빠 많이 바빠?”
“응, 좀 바빠. 근데 왜 물어봐?”
“아빠, 방학하기 전에 우리 반 학예회 하는데, 학예회 때는 장기자랑을 하거든?”
“그래?”
“남자애들은 거의 태권도 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도 태권도 하려고.”
“태권도 어떻게 할 건대?”
“사범님이 나한테 품새 잘한다고 칭찬해줬어. 그래서 나 고려 품새하려고.”
“고려? 품새 이름이 고려야?”
“응. 태극 8장보다 훨씬 어려워. 근데 나 되게 잘해.”
“그렇구나. 다음에 아빠한테도 보여줘.”
“학예회 때 오면 볼 수 있는데…. 아빠 못 오지? 엄마도 못 올 것 같고.”
“은수야, 아빠가 가면 좋겠어?”
“그런데 아빠 바쁘잖아. 오면 좋긴 한데.”
“아빠가 꼭 간다고 약속할 순 없는데 시간 만들어 볼게.”
“진짜? 진짜? 아빠 12월 23일이야. 아빠 오면 진짜 좋겠다.”
수업 시간에 웃다가 선생님께 혼났다. 아빠가 학예회에 와서 내가 품새 하는 걸 보고 막 손뼉 치는 모습을 상상하니 자꾸 웃음이 나왔다. 즐거운 상상을 하다 보니 수업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태권도장에서는 품새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다. 아빠한테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 집에 가기가 너무 싫다. 아무도 없는 집, 나 혼자 엄마와 아빠를 기다리는 심심하고 외로운 집. 아빠는 다시 갔을 거고 엄마는… 엄마는 없을 게 뻔하다.
아빠는 마트에서 먹을 것을 잔뜩 사다 놓고 갔다. 엄마가 밥을 챙겨 주지 못해도 나 혼자서 배고프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내가 덮던 이불은 빨아서 널어놓고 거실에 두꺼운 이불을 깔아놨다. 베란다에 가득 있던 쓰레기들도 다 버려서 집이 깨끗해졌다.
오늘 아빠랑 같이 학교도 가고 정말 기분 좋은 날이었는데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날 것 같다. 혼자 있는 건 정말 싫다. 화장실에 가다가 안방을 쳐다봤는데 엄마가 누워 있었다. 없는 줄 알았는데 엄마가 집에 있었다. 나는 다가가서 잠든 엄마의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
‘엄마, 아프지 마. 엄마 사랑해. 엄마, 엄마.’
엄마 이마에 뽀뽀하고 가만히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