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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wa Mar 21. 2023

은수 이야기(끝)

J가 들려주는 동화

 수요일 밤에 아빠가 왔다. 내일이 할아버지 49재여서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음식을 만드느라 온종일 바빴다. 아빠는 할머니와 인사할 때 빼곤 눈도 안 마주쳤다. 텔레비전이라도 켜놓지 않았으면 집이 너무 조용할 뻔했다. 할머니는 아직도 만들 음식이 더 있는지 부엌에만 있었다. 아빠가 내 방에 들어가서 잠깐 이야기하자고 했다. 


 “은수는 할머니 좋아? 왜 좋아?”

 “할머니 좋아. 할머니는… 할머니는 엄마 같아.”

 “엄마 같아?”

 “우리 엄마는 다른 애들 엄마랑 좀 다르잖아. 그런데 할머니는 다른 애들 엄마처럼 그래.”

 “…”

 “아빠 나 할머니랑 계속 살면 안 돼? 아빠는 맨날 바쁘고 엄마는 나한테 관심도 없잖아. 나는 할머니랑 사는 게 좋아. 여기 할아버지 집도 좋고 친구들도 다 여기 있고. 할머니랑 여기서 계속 살았으면 좋겠어.”


 할아버지 49재를 지내고 집에 왔다. 아빠는 또 무슨 할 말이 있는지 할머니랑 둘이 안방에 들어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빠는 집에 자주 온다. 올 때마다 할머니랑 둘이서만 오래오래 이야기한다. 어른들만 알아야 하는 일인지 나한테는 말해주지도 않는다. 친구랑 나가서 놀고 오라고 하거나 내 방에 가 있으라고 했다. 한 번은 할머니가 소리를 질러서 깜짝 놀랐다. 할머니의 화난 목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아빠도 얼굴이 빨개져서 방에서 나왔다. 할머니랑 아빠랑 싸운 것 같았다. 

 

 소파에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나 귀 기울이고 있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빨리 아빠가 나왔다. 나한테 할머니 말씀 잘 들으란 말만 하고 저녁도 안 먹고 갔다. 할머니랑 아빠랑 싸운 것 같지는 않은데 할머니도 말없이 저녁 준비를 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할머니랑 아빠 둘 다 기분이 좋지 않은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나는 일찍 자겠다고 말하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누워서 멀뚱멀뚱 천장만 보고 있는데 할머니가 방문을 열었다. 나는 그냥 자는 척했다. 할머니는 내 옆에 앉아서 내 머리랑 이마랑 볼을 쓰다듬었다. 


 “은수야. 은수, 할머니랑 살래? 엄마 아빠 없어도 할아버지 없어도 할머니랑 살래?”

 “네! 난 할머니랑 살래요. 할머니하고 살고 싶어요.” 


 나는 번쩍 눈을 뜨고 대답했다.


 “할머니도 우리 은수랑 살고 싶어.” 

 “진짜죠? 할머니 나랑 살 거죠?”

 “응. 할머니가 우리 은수 많이 많이 사랑하거든.”

 “나도 할머니 많이 많이 사랑하는데.”

 “은수야, 그럼 우리 둘이 살자. 할머니는 은수랑 사는 거 좋아.”

 “나도 좋아요, 나도 엄청 좋아요. 나는 옛날부터 할머니랑 사는 거 좋았어요.”

 “아이고 이쁜 내 새끼.”


 할머니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일어나서 할머니를 꼭 안아주었다. 할머니도 나를 꼭 안았다. 




 우리는 지금처럼 앞으로도 쭉, 계속 같이 살기로 했다. 가끔 할아버지 얘기도 하면서 씩씩하게 잘 지낸다. 아빠는 여전히 한 달에 한 번 나를 보러 온다. 그리고 엄마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냈다. 나를 완전히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제 곧 겨울방학이다. 4학년이 되면 내가 할머니보다 키가 더 커질 것 같다. 그럼 내가 할머니를 지켜줄 수도 있다. 


 나는 요즘 정말 행복하다. 내가 사랑하는 할머니 최화순이랑 할머니가 사랑하는 나 김은수랑 우리 둘이 같이 있어서 참 행복하다.     



 동화 쓰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를 따라 덜컥 신청을 했는데 첫 수업을 듣고서는 좀 막막하더군요. 동화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쓸지 아무 계획이 없었거든요. A4 한 장에서 한 장 반 정도의 글만 쓰다가 단편동화처럼 긴 글을 정해진 시간 안에 완성해야 한다는 것도 부담스러웠어요. 

 그때 아주 오래전 들었던, 혈연이 아닌 할머니와 손자의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모임에서 겨우 3,4분 정도 지나가듯 들었지만 잊을 수 없었던 이야기였지요. 그 두 사람을 모티브로 '은수 이야기'라는 동화를 쓰게 되었어요. 처음 쓰는 동화라 이렇게 쓰면 되는 건가 안 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마감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완성을 하게 되었어요. 부족한 글 솜씨라 마음을 다 담을 수 없어서 아쉽지만 그래도 은수의 이야기를 풀어놓았습니다. 은수와 할머니가 어디선가 아주 잘 살고 있을 것만 같아서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요즘엔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많이 있지요. 저도 혈연은 아니지만 가족이 된 언니가 있습니다. 

 핏줄은 아니지만 서로 소중히 여기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며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계속 쓰고 싶습니다. '은수 이야기' 9회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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