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을 기웃거리며
양쌤의 another story 45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 기형도
나는 시인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사랑을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이별을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감정의 무게를 고스란히 껴안지 않아 가벼워진 탓일까
표면에 둥둥 떠 있기만 하는 나의 단어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수습되지 않는다.
시인은
사랑이 머물렀던 시공간이 멈춰선 후
온 힘을 다해 복기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만 가지 사랑의 흔적이 휘발되기 전
마침내 결단한다.
문을 잠근다.
돌아선다.
어느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봉인했다.
내가 그의 빈집을 기웃거릴 수 있는 이유,
바스라지지 않는 그의 언어를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오월의 씀바귀꽃 위로 퍼지는 아카시아 향과
커다란 나무의 초록 그림자가
오래오래 그의 시를 지켜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