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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Dec 14. 2023

비가 내리는 동안 겨울은 깊어진다

계절과 감성


   일 년 동안 사무실이 사무실스럽도록 꾸몄던 가구들을 하나씩 처분하고 있다. 기상청 예보대로 점심 나절부터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유리로 햇살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더니만 비를 뿌리는 하늘. 아무튼 오락가락 종잡을 수 없던 날씨를 피해 달아난 햇살은 하늘 저편으로 올라갔다. 비가 오는데 탁자를 가지러 온 고객에게 미련을 담아 탁자를 건넸다. 의자를 가지러 온 고객에게 쓸데없는 말을 걸었다. "의자를 어디다 쓰실 건가 봐요?" (당연하지. 이걸 질문이라고 묻고 있냐...)  "아~ 가게에 의자가 부러져서요 ㅎㅎ." (그랬구나! 부러져서 의자를 샀구나.) "안녕히 가세요~"

   다음은 블라인드 차례다. 이사할 가게 창문에 매달아 볼까도 생각했던 블라인드다. 계속 당근 고객들에게 이것저것을 팔아치웠더니 웬만한 물건들은 팔아버리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변심하기 전에 얼른 블라인드 사이즈를 줄자로 재고, 포인트가 될만한 위치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네 장의 사진을 올리고 나서 십 여분이 흘렀다. 고객 한 명이 당장 사무실에 블라인드를 보러 오겠다며 시간을 정하자는 문자를 보내왔다.


 '다소 당황스럽다. 사진과 간단한 설명을 올렸지만... 그랬다고 해서 저것을 보낼 마음의 준비가 된 건 아닌데 말이다. 블라인드야! 어떡하면 좋겠냐?'

'미안하다. 너랑 의논 없이 팔아버리기로 결정한 거 말이야. 조금 미안하네.'

'그래도 저 고객의 문자 속도를 보아하니 저분한테 팔릴 것 같다.'

-

-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오늘 못 가겠어요."

"네"

"제가 블라인드를 사긴 할 거거든요."

"네, 그럼 맑은 날 오세요."

날씨가 맑아지면 블라인드를 확인하러 오라 해놓고 '예약 중'을 걸지 않았다.

-

점심을 먹고 나서 톡을 확인했다.

"선금을 보낼게요. 계좌번호를 알려주세요."

(아... 이분이 확실하게 구매할 작정이구나.)





블라인드에게 한 마디 남기겠다.


'사실, 반반이었다. 팔 수도 안 팔 수도 있었거든. 솔직히 블라인드한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니라, 일 년 가까이 블라인드 끈을 당기고 올리던 나한테 하는 말이다. 사무실에 옅은 크림색톤 블라인드가 쳐져있어서 내가 좀 안정감을 느꼈다. 독서모임을 할 때마다 정확히 복지회 공간을 이 등분할 수 있어서 좋았다. 회원들은 이쪽 공간을 포근하게 느꼈고, 불이 꺼진 옆 공간은 왠지 써늘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처음 블라인드를 걸 때만 해도 몇 년은 지탱할 줄 알았다. 근데 일 년 정도 지내고 이사를 가는구나. 잘 된 일이다.

블라인드 덕을 최대로 누렸던 지난 일 년의 기간이었다. 왜냐면, 서른 세 평 사무실에서 일부는 온기가 있었으면 싶었는데, 구획을 나누니 더는 썰렁하지만 않았다. 사람들은 이쪽 공간에서 여러 가지 책들을 읽었다. 동화책, 청소년 문학도서, 루이스의 책들, 인문학 책, 역사, 소설을 말이다. 읽고 나면 깨달아지는 각자의 생활 속 자신을 돌아보게 되더라. 실험도 해보자고 작정도 했었지.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고전을 어떻게 읽으라고 이 책을 결정했냐며 따지는 회원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를 진정시키면서 했던 말이, "내가 잘 끌고 갈 테니 나중에는 재밌어할 거다~."였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산 정상으로 돌을 굴리듯 어려웠던 고전을 이해할 수 있게도 됐다.

겨울철 난롯불을 한 대씩 끼도 앉아 독서 나눔을 했던 기억도 있다. 몇 명 되지 않는 인원의 직장인들이 퇴근하고 이곳으로 들어올 때, 블라인드가 쳐져 있어서 어둠과 추위가 가려졌다.  있을 때는 살피지 못했던 것이 먼지처럼 마음에 내려앉아 나의 감정이 되었다. 마음 속 어딘가에 있감정을 접으면서 알게 된다. 사물을 떠나보낼 때에도 어떤 종류의 것은 감정 정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른 곳에서는 다른 블라인드든 커튼이든 그 공간을 감싸줄 무언가를 준비할 계획이다. 그리고 내일 비가 그친 길을 따라 새로운 주인이 찾아오면 반갑게 물건을 건네줄까 한다. 잘 가라~ 나의 일 년의 블라인드여~'




   비는 내리지만 필요한 물건을 찾으려고 문구점에 들렀다. 지하 매장과 일층을 샅샅이 뒤져도 안 보이는 물건을 결국 인터넷몰에서 구매했다. 그리고 오늘은 조금 길게 휴식을 갖고 싶어서 밀크티 전문점엘 들렀다. 카페 주인이 단골이라고 영화관람 티켓 한 장을 주셨다. 몇 주 전에 받은 티켓도 아직 사용하지 않았는데 다시 한 장 더 생겼다. 12월이 다 가기 전에 극장가로 발걸음을 할지 현재로선 모르겠다.

   당분간 하는 일을 끝냈기 때문에 시간 죽이는 일 외에는 하는 일이 없다는 기분이 든다. 너무 바쁘게 지냈을 수 있다. 촘촘하게 숨 쉴 여유마저 지우며 사는 게 열심히 사는 건 아닌 걸 안다. 그런데 여유 없는 현대인의 일원으로 살아야만 살아간다고 했던 것 같다. 분주함이었다고 생각한다. 나한테 온 시간을 어영부영 보내니 어느새 십 이월이다. 교회 절기로 말하자면, 대림절을 보내고 있다. 예수님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시즌이다. 대림절을 기억하고 내가 들어야 할 내일에 대한 메시지를 기다리는 자세가 문명의 귀퉁이에서 벌어지는 일일 찌언정 나는 십 이월이 오면 늘 기대가 차오른다. 그 기대를 무엇으로 채우지 못해도 괜찮은 그런 겨울인 거다. 그리고 오늘은 비까지 여름 장마처럼 많이 내리는 중이다. 겨울을 깊이깊이 깊어지게 만드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행복한 나다.


   내일이 오면, 사무실을 양분하던 블라인드를 내리고 다소 어수선한 사무실 청소를 할까 싶다. 처음엔 비어 있었고 일 년 동안은 가득 채워졌었다가 다시 비게 될 거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곳 사무실에서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 다가오는 마지막이라 이름 붙여진 태그를 하나씩 둘씩 떼어낼 작정이다. 그렇게 하고 나서 새 장소에서 시작하게 될 거다. 나의 옛 생각들과 고민들과 성냄과 기분 좋음을 정리하는 게 물건을 치우는 작업과 닮았다. 어디서 다시 시작하든 이런 비움의 감정들은 다시 반복된다. 반복을 계속 맞이해야 하는 게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새로운 때가 되면 나는 마치 지금의 기분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흥분하고 즐거워했다가 우울했다가 정신을 차리다가 놓다가를 다시 시작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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