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첫날. 보라돌이 할머니는 채소 팔러 나오셨다..(초상권 보호를 위해 뒷태를 담았다.) 2024.07.09
"할머니, 가지 좀 주세요. 비 오는데 나오셨네요?"
"양동에는 아침에 비가 안 왔다."
(*양동 지역은 울산에서 동해 바다를 끼고 경북쪽으로 가다보면 도착하는 곳이다)
길이는 적당하고 몸이 매끈하게 잘 빠진 가지 여섯 개 한 소쿠리에 2천원이다.
"비름나물도 주세요~"
"이거도 2천원이다."
"할머니, 봉투 가져왔는데 여기 담아주심돼요."
할머니는 자연스럽게 비름나물 옆자리에 펼쳐놓은 고추에 손을 뻗어한 움큼을 주먹지고 비닐봉다리에 넣으셨다.
"이리 비 오는데 나왔어요?"
"양동에 비가 안와가꼬 왔다. 거는(거기는) 아침에 비가 안와따."
'두 세번 같은 말을 반복해도 대꾸를 해주고 싶은 투박한 할머니의 목소리다.'
호박잎을 감싼 까끌까끌한 털을 부비듯 투박한 할머니의 목소리를 글로 저장해본다. 너른 비닐포대를 시멘트 바닥에 깔고 경운기에서 실어다가 부린 농작물들이 작은 언덕배기가 된가지와 호박과 고추와 호박잎이 다 팔릴 때까지 장보러 나온 아줌마랑 무한반복할 것 같은 오고가는 그 말은 좀전에 내가 할머니와 나눴던 말과 오십 보, 백 보 엇비슷하리라. 장보러 나왔던 손님들은 무거워진 장바구니를 손에 끼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손은 무거울찌언정 마음은 전혀 무겁지 않을테지.
*쓰다가 멈췄던 7월9일의 이야기를 이제야 마무리한다.
할머니가 뜯어서싣고온 나물과 야채를 부리는 골목 입구는 시장쪽으로샛길이있고,맞은 편은 버스 정거장이라이곳 인근 주민들이 늘상 그 앞을 지나는 사통팔달이니 그보다 명당 자리는 없는 것 같다. 자리세를 내는지 모르지만 장사꾼들은 늘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물건을 펼친다.
내가 장을 보거나 안 보거나 그 옆을 지나면서 곁눈질로 봐도 농작물로 쌓인 둔턱은 빠르게 높이가 낮아지는 것 같다. 그렇게 이른 아침을 지나점심 먹을 시간이 다가오면바닥에 닿을 정도로 줄어들어 서너 소쿠리에 담긴 장삿거리 앞에 쪼그려앉은 주인은 소꿉장난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지퍼가 반쯤 열린 낡은 장가방 밖으로는 뭉쳐진 보자기들 꽁지가 제멋대로 삐져나와 있다. 그렇게 새벽부터 부지런히 손을 놀려 하루치 장사가 파장을 목전에 두면 할머니 손에는 몇 장의 보자기들과 플라스틱 그릇이 하나둘 켜켜이 쌓여간다.
나는 한번 두번 할머니가 담배를 입에 문채 시장 바구니에 나물을 담는 모습을 봤다. 나는 속으로 '흑! 담배! (근데) 멋있어보여~'라고 놀라면서도 웃음이 지어졌다. 담배 한 개피로 생 폼잡는거랑 차원이 다른 포스의 느낌은 그 출처가 어쩌면 할머니의 손바닥처럼굳은 살이 박히고 거칠고 두꺼워진 삶의 연륜으로 보였다.
시장에 나오는 날이거나 쉬는 날이거나 할머니는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밭으로 나가 가지 줄기에서 가지를, 차양처럼 넓게 퍼진 호박잎 틈에서 잠이 덜 깬 호박을, 주렁주렁 고춧대마다 달린 시퍼런 고추를 훑듯이 따고 자루에 주워담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봤다. 당신의 하루를 위해서 아침마다 열심히 밭으로 걸어갔을 할머니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상상하는 게 꽤나 즐거웠다. 손님은 돈을 주고 야채들을 샀어도 마음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건 약간이라도 그분의 수고에 보상해드렸다는 나만의 착각에 빠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장마는 그럴싸하게 출발하고도 하루 이틀을 겨우 끌다가 일찍 끝났다. 몇날몇일 불가마 안에서 살고 있는 요즘은 어정쩡하게 끝나버린 장마가 야속하다. 지열은 깊은 밤이 되면 잠시 뜨끈한 정도를 유지하다가 아침부터 가열차게 기온이 오르며 저녁에도 식을 줄 모른다. 아파트 옆 공원 벤치에 주저앉아 잠시 숨을 돌리는 사람들은 비를 거둬간 하늘이 원망스럽다. 나도 하늘이 원망스럽긴 마찬가지다. 아파트 화단마다 흙 먼지가 날릴 정도로 땅이 바짝 메말라있다. 나무들은 그렇게 건조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도 초록색 잎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습기를 머금지 않은 타는듯한 땡뼡 아래 너무도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베란다와 거실 문은 한 겨울 한기를 차단하듯 그렇게 굳게 닫고 열기를 두려워한다. 가끔 화분에 물을 뿌리러 베란다쪽 문을 열때면 바깥 열기가 훅하니 서늘해진 실내 공기를 가르고 들어오는데, 그 기운은 마치 집 안으로 불길한 무엇이 들어오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너무 뜨거운 날씨 때문에 정신이 혼미한 게 아니다. 정신줄을 놔버리면 속이라도 편해질까 싶어서 별별 계산을 해본다. 물론 답은 없다. 살을 태울 것 같은 맹렬한 열기 탓에 생각을 하나에 집중하고 뚫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속이 탄다.
'괜찮다고 말해줘요.'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해도 손에 거머쥔 것이 없는 요즘. 나는 어제 했던 일을 다시 한번 오늘도 반복하는 정도로 생활하고 있다. 걷는다고는 하지만 진도가 안 나간다. 그래서 자꾸 허탕치는 제자리 걸음이 헛되게만 보인다. 애쓰고 있어도 내가 나를 알아주지 못해서 맥이 빠지는 요즘이다.
실직한지 육 개월이 지났다. 휴업하고 물건을 두었던 서가를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이전한 장소는 이십 대 때 살았던 아파트 맞은편 반지하 건물로 가구랑 책가지들을 옮겼다. 1월에 이사할 때는 지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면, 이번에는 한번에 짐을 다 옮기고나니 몸이 덜 아픈걸 느낀다. 가급적 짐을 줄이고 줄여서 더부살이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내 공간이 있다는 건 안심이 된다.
7월25일 목요일 오전에 이사를 했다. 많지 않은 짐을 옮기는데도 지인들이 손을 보태주셨다. 이사를 한 다음 날엔 다른 사람이 와서 짐 정리를 도와주었고, 세째 날부터는 비로소 혼자 일하기 시작했다. 이사하고 두 주가 지난 오늘 처음으로 느긋하게 서가에서 시간을 보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모서리 두 곳에 모기향을 피워두고, 실내에는 공기청정기를 돌리고, 바깥으로 환기할만한 베란다쪽 창문을 열어뒀다. 바깥에서 안쪽으로 더운 공기가 훅하고 밀려들어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서가 입구쪽으로도 더운 공기가 들어오는지 서늘했던 공간이 금새 더워지고 뽀송뽀송해지는 것 같았다.
이 장소에서 무슨 일을 진행해야할까? 이미 유행이 지난 옷을 건네받은 것 같은 독서에 패러다임의 전환을 찾고 있는 중이다.
'이 일로 먹고 살면 좋겠다.'
'먹고 사는데 힘들면 다른 일도 해야겠지...'
절망의 바닥을 뚫을듯한 저기압 상황에서도 학생 한 명이 독서지도를 받기로 했다. 이름은 그럴싸하게 '방학 특강'이고, 한 사람만을 위해 수업을 개설했다.
아마도 다른 변수가 없는 한 내일 오후에 첫 번째 만남을 가질 예정이다.
유순희 작가의 <우주 호텔>이라는 책으로 수업을 진행할텐데... 폐지를 줍는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하드 커버 책에 앞표지를 보면 별이 빛나는 밤에 소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동네를 위에서 내려다보듯 그린 그림이다. 하지만, 앞 표지와 달리 뒤표지는 밝은 대낮에 동네 풍경이다.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 할머니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울컥할 정도로 올라오진 않았는데...
왠일이야?!
어제 새벽 뜸하게 참석했던 새벽기도 시간에 리어커를 끌고 가는 주인공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다른 사람한테 폐지를 뺏기지 않으려고 싸우는 장면에서, 작은 체구가 폐지더미에 가려져 리어카만 움직이는 장면에서, 아이가 가져다준 폐지 속 그림을 보면서 심경에 변화를 느끼는 장면에서, 일시에 밀려드는 어떤 감정. 즉 '연민'이라는 어휘로 내 감정을 다 묶더라도 갑자기 예상치도 않았던 슬픔이 밀려오면서 할머니를 향해 구슬프게 울어댔다.
그렇게 폐지 줍는 할머니가 내 마음 안으로 들어와서 미지근했던 마음을 가열했던 기도였다. 내가 깨달은 메시지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자칭 '여름 특강'은 그저그런 모임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럴싸한 수업이 되어서도 안 되고, 자기 만족에 가슴만 한껏 부풀려서도 안 되고, 소중한 한 명의 학습자를 위해 준비된 수업이 되어야 한다며 내 눈물이 말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