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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곤씨 Apr 20. 2021

너의 말은 나에겐 몸짓이 되어

이종


 지우네 아파트 지하에는 커뮤니티 센터라는 이름의 주민시설이 있었다. 헬스장과 샤워실, 작은 독서실이 있는 그 공간을 지우는 이용하지 않았다. 지우가 다니던 곳은 커뮤니티 센터 입구 앞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였다. 지하 1층 주차장과 야외를 연결하는 곳의, 천장이 없는 쪽은 하늘이 바로 보이고, 천장이 있는 쪽은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뿐인 작은 공터였다. 크고 작은 화분들이 햇살을 받고 있던 그곳이 지우는 너무 마음에 들었고, 그 날부터 그곳을 자신의 아지트로 정했다. 지우는 9층의 집보다 그곳을 더 좋아했다.


 다만 그곳이 지우만의 아지트는 아니었다. 날씨가 좋은 날엔 그곳은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쓰였고, 어쩔 수 없이 지우는 날씨가 적당하지 않은 날에만 그곳을 아지트처럼 쓸 수 있었다. 그래서 지우는 아지트를 쓸 수 있는 날은 꼭 아지트를 쓰러 내려갔다. 보고 싶은 책이나 노트북을 들고 내려가 몇 시간을 앉아 있었고, 어떤 날에는 커피가 담긴 텀블러와 잔을 들고 가기도 했다. 계단 위의 하늘을 한참 바라보다 감상에 젖는 날도 많았다. 너무 더운 날엔 그늘과 선선한 바람이 좋았고, 비가 오는 날에는 내리는 비가 화분들을 적시는 걸 보는 게 좋았다. 또 하나의 이유로 지우는 아지트를 더욱 아끼게 되었는데, 비가 내리던 어느 날을 시작으로 아지트에 자주 찾아오던 고양이 한 마리 때문이었다.




  처음 이곳에 온 나는 쉴 곳을 찾아 헤맸다. 이곳은 어딜 가나 사람들이 많아서 나는 풀숲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을 처음 찾은 건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비를 피해 낯선 곳에 들어간 나는 아래로 뻗어있는 계단을 발견했다. 내려가 보니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나왔다. 거기선 비나 눈이 내려도 젖지 않았고, 너무 더운 날엔 시원한 돌바닥에 누워있을 수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나는 긴장을 풀고 쉴 수 있었다. 하지만 날씨가 좋은 날엔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했고, 그런 날에는 그곳에 갈 수 없었다. 그래도 너무 덥거나 너무 추운 날에 갈 곳이 생겼다는 점에서 충분히 좋았다.


 그 아이를 처음 본 날도 비가 내렸다. 의자 위에 엎드려 잠을 청하는 중에,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에서 깨 의자 밑으로 내려갔다. 여자 아이 한 명이 네모난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아이는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나를 만지러 다가오는 줄 알고 도망칠 준비를 하는데, 그게 보였는지 아이는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고 의자로 향했다. 의자 하나를 빼 내 쪽에 놓아두고, 아이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이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비슷한 하루가 쌓여갔고 아이는 내게 그 공간의 일부가 되어갔다. 나도 더 이상 아이를 경계하지 않았다. 아이는 그게 보였는지 이내 말을 걸기 시작했다. 말을 건다기보단, 혼잣말을 할 테니 너는 들으라는 식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모르는 말을 많이 알 수 있었다. 아이의 이름도 알게 되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날에만 그곳을 찾았고 아무도 없는 날에는 항상 지우가 있었다. 지우는 어느 날부터 책 말고 다른 것들을 가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푹푹 찌는 어떤 날엔 지우는 투명한 통에 검은 물과 하얀 돌을 담아 내려왔다. 검은 물은 내가 마시면 안 된다며 하얀 돌을 몇 개를 주곤 했다. 얼음은 가지고 놀다 보면 금세 녹아버렸다. 검은 물을 커피라고 부르는 건 알려줬지만 왜 내가 마시면 안 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자기도 잘은 모른다고 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엔 기다란 털뭉치를 들고 내려와 물기를 닦아주며 고생이 많다고 했다. 눈 오는 어느 날에도 지우는 수건을 들고 내려왔는데, 뭔가 두툼해 보이는 그 수건을 자기 옆자리 의자에 둔 채 커피를 마셨다. 나는 호기심이 생겨 의자 위의 수건 옆으로 다가갔다. 봄에 쬐던 햇살보다 따뜻했다. 지우는 수건 안에 들어있는 건 핫팩이라고 말해줬다. 이마트에서 세일을 하길래 많이 샀다고 말해주었다. 모르는 말이 많아 나는 열심히 지우의 말을 들었다. 목소리를 듣다 잠이 드는 날도 있었다. 잠에서 깨고 나면 지우는 없었고 수건 안의 온기도 사라져 있었다. 수건은 항상 지우가 챙겨가는 건지, 비 오던 다른 날 지우는 같은 수건을 들고 내려왔다. 나랑 비슷한 색깔이라며, 내 수건으로 따로 빼놨다고 했다.


 추위가 끝나가던 어느 날, 지우는 책 보다 훨씬 큰 네모난 무언가를 들고 내려왔다. 그 날은 지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평소보다 열심히  반겨주었지만 얼굴에 그늘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우는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능을 평소보다 못 봐서 가고 싶던 대학에 가지 못했어, 그래서 학교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됐어, 가고 싶던 학교에 붙었으면 이사 갈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럼 너도 계속 볼 수 있고, 꼭 보고 가고 싶었는데 오늘도 있어서 다행이야, 네가 좋아하던 수건을 밑에 깔았어, 여긴 바닥이 돌이라 아직 차가울테니까, 데려갈 수 있으면 데려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알러지가 심하셔, 미안해, 너는 눈비 오는 날엔 항상 여기 있으니까 다시 동네 올 일 있을 때 눈비 오면 놀러 올게, 상자엔 치우지 말아 달라고 크게 써놨으니까 경비아저씨가 안 건드릴 거야, 눈비 오면 놀러 올 거니까 꼭 여기 있어야 해,


 지우의 말엔 내가 모르는 말들이 너무 많이 섞여 있었다. 마지막 말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눈비 오면 놀러 올게. 지우가 두고 간 상자는 크고 따뜻했다. 비 오는 어느 날 덩치 큰 사람이 다가와 나를 쫓아내고 상자를 가져가기 전까지는. 그날도 비가 내렸고 나는 곧 지우가 내려와 다시 상자를 주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우는 오지 않았다. 며칠 뒤에 또 비가 내렸다. 하루 종일 지우를 기다렸지만 지우는 오지 않았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비는 거의 내리지 않았다. 햇살을 받으니 지우가 줬던 신기하고 따뜻했던 수건이 생각났다. 나는 비 오는 날과 지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나는 비를 피하며 설레는 발걸음으로 아지트에 갔다. 지우는 없었다. 돌바닥에 앉아 지우를 기다렸다. 하늘이 검어지는 동안에도 지우는 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 다시 비가 자주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비가 오면 언제나 그곳에 앉아 있었다. 신기한 수건을 들고 지우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발소리는 몇 번 들렸지만 지우는 아니었다. 비가 그치고, 나무들이 잎을 버리고, 눈이 내렸다. 화분 위에 눈이 소복이 덮인 어느 날, 처음 보는 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지우보다 좀 작은 아이는 수건도 커피도 책도 들고 있지 않았다. 아이는 나를 잡으러 뛰어왔고 나는 계단을 뛰어올라 아이 눈에 닿지 않게 풀숲으로 숨어들었다.  지우보다 더 큰 사람이 와서 아이를 데려가기 전까지 아이는 지친 기색도 없이 나를 쫓아다녔다. 눈 덮인 산책로는 너무나 차가웠다. 작은 아이의 소리가 들리지 않자 나는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지우보다 더 큰 사람과 지우가 만들어준 박스를 가져갔던 덩치 큰 사람이 거기 있었다. 도둑고양이가 있다, 애들 키우는 아파트에 위생적으로도 안전상으로도 좋지 않다, 빨리 잡아서 병원에 보내든 관리소에 보내든 해라.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우가 나에게 보여준 적 없던 무서운 표정이었다. 지우가 말한 경비아저씨가 저 덩치 큰 사람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다시 그곳에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눈비 오면 지우가 내려올 텐데. 지우가 따뜻한 수건을 들고 내려올 텐데. 망설이는 것도 잠시, 경비아저씨가 나를 발견하고 계단을 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초록 털이 달린 막대기가 내게 날아왔다. 막대기는 큰 소리를 내며 내 옆으로 떨어졌고, 나는 경비아저씨를 피해 처음 이곳에 들어왔던 곳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경비아저씨는 내가 도망쳐 나온 곳을 유심히 보더니 큰 돌을 들고 와서 그곳에 박아버렸다. 지우가 말했던 것 중에 이해하지 못했던 말들이 기억났다. 수능, 대학, 이사. 지우는 그 말을 한 이후로 오지 않았다. 나는 생각했다. 지우보다 더 큰 그 사람이 수능이고, 경비아저씨가 내게 던진 털 달린 막대가 대학이구나. 이사라는 건 돌아가는 길이 막히는 거구나. 눈비 오면 지우가 올 텐데, 아지트로 날 만나러 올 텐데. 이사 앞에서 나는 목놓아 울었다. 소리를 들은 수능과 경비아저씨가 다시 다가왔다.


 나는 수능과 경비아저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도망쳤다. 아지트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수능도 대학도 이사도 없는 곳에 가 있으면 지우가 올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 하나로 나는 새로운 아지트를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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