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곤씨 Aug 22. 2020

너는 가시덤불 안에서 나오질 않잖아

스포 있는 [파수꾼] 리뷰


자신의 가장 안쪽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은, 우리는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한 꺼풀 한 꺼풀을 드러낸다.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에겐 가장 진실해진다.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 본연의 나, 너, 우리가 된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에게 거울 속 자신은 흠이 너무 많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걸 그들은 모른다. 어쩌면 자신을 드러내는 법을 모른다고 봐도 될 정도다. 관계를 잘못 배운 그들에게 민낯을 마주한다는 건 공포스러운 일이다. 모두가 민낯인 파티에서 그들은 가면무도회를 연다. 민낯을 내보인 이들에게,  가면을 끝까지 벗지 않는 행동은 이해받을 수 없다. 결국 퇴장한다. 가면을 벗는 법을 배울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헤멜 일이 남아있다.



  아이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사회생활은 해보지 않은 나이. 그맘때의 교실에는  것들이 가득하다. 조금 일찍 성숙해진 몇몇을 빼고, 우리는 가장 본인다운 모습으로 부대끼며 지낸다.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생긴다. 우리의 학창 시절까지는 모르겠다. 나는 학창 시절을 내가 누군지 알아가는 우리들의 크고 작은 마찰이라고 말하고 싶다. 잠깐 따뜻할 정도로 작은 마찰도 있었지만 모든  태워버린  마찰도 있었다. 수많은 마찰로, 우리는 열꽃을 달고 살았다.



청소년기의 인간에게, 누군가의 관심은 굉장히 달콤하다. 그 관심에 어떤 감정이 담겨있던, 어쩌면 아무런 것도 담겨있지 않아도 관심과 주목은 그 자체로 사람의 내면에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기태(이제훈 분)에게 생긴 건 우월감과 권력을 가졌다는 착각이었다. 사회 그 어느 곳을 가도 무리에는 무리의 '장'이 있다. 교실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실질적이건 형식적이건, 권위적이건 인도적이건, 학생들 모두 교실의 '짱'이 누군지 알고 있다. 직급, 자리, 위치, 별명, 주홍글씨. 어떤 형태로든 사람을 '규정하는' 단어들은 그에 맞는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모두 다른 학교 다른 반에 다녔지만, 반이나 학교의 짱들은 꽤 비슷한 말로 기억되고 묘사된다. 그들은 대부분 무리의 중심에서, 항상 옆에 몇 명을 데리고 다니며, 각종 형태의 폭력에 익숙함. 기태도 똑같다. 기태가 다른 점이 있다면, 천성과 맞지 않았는지 짱이라는 자리가 진짜 본인을 억눌러버린 것이다. 잘못한 것을 알고도 사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사실 그 행동이 잘못인지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첫 시작은 컴플렉스였다. 한부모 가정이라는 컴플렉스를 가진 기태가 '너는 부모님 이야기만 나오면 아무 말도 안 하고 화제를 돌리려 한다.'는 말을 듣는다. 이런 말을 듣고 자아성찰과 이해와 용서가 한 번에 이뤄지는 인간은 당연하게도 없다. 기태가 화를 삭이며 말한다. 우리 집안 사정은 이렇다고, 그래서 집 이야기를 하면 나는 할 말이 없다고. 듣는 희준과 동윤이 기태보다 5살쯤 많은 어른이었다면,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 그런 말을 듣고 상대에 대한 이해와 빠른 사과와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번에 하는 인간 역시 없다. 작은 마찰이 큰 마찰이 되고 결국 불씨가 날린다.



 수많은 순간이 있었다. 인상 피라는 협박 대신 진지한 대화를 할 수도 있었고, 권력을 등에 업은 집단 폭행 대신 용서를 빌 수도 있었다. 폭력을 가한 뒤에 던지는 몸은 좀 괜찮냐는 말은 침묵보다 못했다. 친구 셋은 모두 같은 나이의 고등학생이고, 정신적인 성숙도도 차이가 크지 않다. 기태는 가면을 벗을 줄 모르고 희준과 동윤은 가면을 벗지 않는 기태에게 더 이상 다가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니가 입버릇처럼 하고 다니는 말 있잖아. 가식적인 새끼 존나 싫다고. 근데 그거 알아? 니가 제일 가식적이야.


파수꾼 中 동윤이 기태에게



모두가 기태를 떠난다. 아무도 기태에게 답을 알려주지 않은 채 떠난다. 기태가 찾아야 할 답은 그들이 떠난 이유,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기태도 답을 찾지 못하고 떠난다. 아버지는 홀로 남겨진 채 아들이 떠난 이유를 찾는다. 아버지가 찾는 답은 얕지만 너무 멀리 있다. 친구들은 다시 모여 기태를 생각한다. 기태의 죽음으로 친구들은 조금씩 변해간다. 기태에게 웃어줄 수 있을 만큼, 기태를 보내줄 수 있을 만큼의 성숙이 찾아왔다.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우리는 가장 위태로운 시기에 서로를 만났으며, 위태로운 서로를 지켜볼 파수꾼은 결국 위태로운 서로일 수밖에 없었다는 걸.



새벽 두시쯤에 영화를 틀었다. 글을 쓰고 싶었고 다시 봤어야 했다. 보다가 기억이 살아나면  생각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감정이입이  많이 된다. 나의 이야기고 우리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가면을 벗지 못해 놓친 기억들이 아른거려 내일 쓰려던 글을 이렇게 바로 써버렸다. 내일의 약속이 오후 9시라서 다행이다. 늦게 일어나 행복한 주말 낮을 맞아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사랑하세요. 인간으로 남고 싶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