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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톨슈 Nov 19. 2021

하혈


 이제 하혈은 멈춘 줄로만 알았는데 계속 피가 나왔다. 한 달 하고도 보름 전, 나는 자궁 속에 호르몬제를 심었다. 의사는 마치 주말에는 수영을 하러 갈 거라는 말처럼 내게 말했다. 빠른 사람은 며칠 만에 적응을 할 테고, 느린 사람이면 삼 년이라도 피가 나올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러더니 마치 수영을 못하는 내가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려도 자신은 도리가 없다는 듯 말을 마무리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아프더라도 하긴 해야죠. 근종도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고요, PMS도 너무 심하시다니까.


 나는 마치 보라색 두부를 입안에 쑤셔 넣은 사람처럼 메슥거림이 차올랐지만, 다른 방도는 없었다. 몇 년째 가고 있는 산부인과는 지겨웠다. 심는 호르몬 시술이 부작용이 크다고 해서 작용할지도 모르는 일말의 희망을 버릴 수는 없었다. 해보고 안 되면, 다시 제거하면 되는 거지 뭘. 나는 애써 남의 일처럼 나의 몸에게 속삭였다. 살아가는 일은 끝없는 도전과 적응의 보드게임이었지만, 질 것 같은 도박에도 자꾸만 나는 돈을 걸었다.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잘 살아지지가 않았다. 


병원을 나오면서는 애써 웃음을 지었고 부러 더 발랄하게 굴었다. 가족에게 문자를 했다. “시술했고, 잘 된지는 한 달 뒤에야 알 수 있다고 해요. 오늘부터 피도 많이 나고 배도 많이 아프다지만 지나가겠죠, 흐하하. “ 머쓱하고 무서울수록 일단 웃어 보이는 것은 어릴 적부터 길러진 습관 중의 하나였다. 웃지 않으면 생각할수록 겁이 나는 것들이 세상에는 많았다.







 친구가 이야기한 부작용 중 하나는 과식과 체중 증가였다. 호르몬의 노예인 인간은 조금씩 새어 나오는 호르몬의 힘을 어쩌지 못하고 그 녀석에게 지배당하기 일쑤였다. 친구 A 역시 강인한 마음을 먹고 준비를 했지만, 1년이 지나자 자신도 모르게 10킬로가 쪄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26의 허리에서 29로 바지를 바꿨고, 사람들은 더 이상 인사치레로라도 그녀를 보고 예쁘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버텼다고 했다. 한 달에 고작 사오일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시간을 알 수 없는 우울증과 짜증에 휩싸여 사는 것보다는 좋다고 했다. 26의 허리를 가진 그녀에게 뒷일에 책임도 없다는 듯 정자를 뿌려대던 남자들에게도 질리고 있던 터였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낙태를 종용하던 전 남자 친구의 마지막 얼굴을 떠올렸다. 그와 이별하고 혼자 가서 낙태를 하고 양재천에서 엉엉 울던 날,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위스키와 함께 수면제를 삼킬 수밖에 없던 지지난 봄, 마치 반항하는 것처럼 자궁이 뒤틀린 고통을 자아내며 평소 2배 이상의 생리를 했던 지지난 여름, 그녀는 조금만 날이 서늘해지면 삼 년을 기저귀를 차고서라도 시술을 받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그녀는 결국 10킬로그램의 체중 증가를 얻었고, 무분별하게 정자를 뱉어내던 철없는 똥파리들도 그녀 곁에 더 이상 많이 달라붙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그래서 차라리 낫다고 했다. 세상에 최선은 없다고. 최악이 아닌 차악만 있을 뿐이니 잘 생각해보라며 덧붙였다.






 그런 친구의 조언은 듣고 나도 찾아간 병원이었다. 늘 그렇듯 산부인과의 공기는 자의로 임신하지 않은 여자에게는 차갑고 낯설었다. 조금만 잘못 발을 디디면 엄지발톱이 빠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구름다리 위 같기도 했고, 날카로운 칼에 복숭아뼈가 베일 것처럼 바닥이 가시들로 이루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산부인과의 공기가 차갑고 바닥은 더 뾰족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흔히 굴욕 의자라고 부르는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벌리고 있자면 그 느낌은 더했다. 무심하게 치마를 말아 올리며 “더 밑으로 내려오세요”라고 말하는 40대 후반 간호사의 눈빛은 세상에는 빛이란 없다는 것처럼 무심하고 쌀쌀맞았다. 그녀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여자의 성기를 지독히도 가까이 봐왔을까. 몸의 소중한 기관이지만, 남들은 부러 보지 않으려 하는 붉고 검고 이상한 모양의 그것들을 하루에 몇십 번이고 본다면, 저런 설익은 참외 같은 표정을 짓게 되는 걸까. 나는 이상하게 굴욕 의자에 앉으며 다리를 벌릴 때마다, 내가 산부인과의 간호사가 되어서 결국은 짓고 말 표정을 상상하곤 했다. 그런 생각에 몰입하다 보면 수치심이 덜 들어서였다. 


 산부인과 진료는 꼭 필요한 것이고 감기 치료 같은 것이니 자주 잘 다녀야 한다고, 누구보다 신여성인척 회사에 입사한 96년생 후배에게 지껄여댔지만, 사실 나도 그 수치심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자꾸만 덜 익은 감이나 외계인의 뇌 주름, 씹다 뱉은 침 고인 껌과 담배연기가 묻은 가래 같은 것들이 생각나는 더러운 기분이 들곤 했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진료는 5분 안에 끝이 났다. 의사는 역시 무표정으로 말했다. “ 이 기구를 넣을 거고, 들어갈 때 많이 아프실 수 있어요. 금방 끝나요. “ 인터넷에서 미리 후기를 백개 넘게 읽었었다. 출산 경험이 없는 여자들의 후기는 난리도 아니었다. 세상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든지, 그렇게 아플 줄 누가 예고라도 해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둥, 애 머리가 자궁에 끼어있을 때 이런 기분이냐는 둥. 그중에 한 유부녀가 남긴 짧은 후기가 인상적이었다. 가까스로 질긴 풍선을 자그마하게 분 뒤, 그 안에 면도칼을 넣어 흔드는 느낌일 것이라고. 나도 이제 경험자로서 말하자면, 그래, 한 1분간은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순간 하늘이 노래졌고, 그로부터 3시간을 절박유산을 한 날처럼 배가 쓰라렸다. 


 시술 후 계산을 하려고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순간에는 머리가 핑 돌아서 다시 주저앉았었다. 사십 대 후반의 간호사는 나를 잠시간 쳐다보다가 말했다. ”힘드실 수도 있으니까, 이따 천천히 계산하셔도 되고, 한참 쉬었다 가셔도 되어요. “ 그녀는 반복된 업무에 이골이 나있었을 뿐, 사람의 다정함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스레 차오르는 억울함과 서운함에 이마 끝까지 차올라있던 눈물이 인중 정도로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눈물은 내 두개골 안에 여전히 차고 넘쳤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 죽집 앞에서, 나는 결국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나는 왜 이럴 때 혼자 죽을 사러 가고 있지?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와는 얼마 전 심하게 다툰 뒤, 한 달째 연락을 하지 않고 있던 차였다. 격하게 외로웠다. 하지만 그 누가 노래하듯, 외롭다고 해서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은 건 아니었다. 경험상 죽을 사 오겠다고 온 사람 치고 죽만 주고 가는 경우는 없었다. 나도 나를 만나기 위해 30분을 찾아온 사람을 1분 만에 보낼 수 있는 성격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누구와도 떠들 수 있는 기운이 없었다. 단지, 외로웠다. 씩씩함 빼면 시체였는데, 나는 신체적 노화와 함께 그 누구보다도 외로움을 곱절로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공평하다고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어릴 때, 일부러라도 제쳐놓고 무시한 외로움들은 어느 순간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이되어 나에게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시술 후 한 달이 지났다. 곯을 대로 곯은 지난한 시간들이었다. 그저 버텼다. 끊임없이 조금씩 새어 나오던 피와 예고 없이 찾아오던 복통들이 조금씩 잠잠해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주기는 하는구나, 하는 인생의 진리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나는 사실 조금 안도했었다. 그래도 몸이란 것이 적응을 하긴 하는구나, 아니면 너무 울어서 밖으로는 더 이상 잘 나오지 않는 내 눈물샘처럼 자궁 안에 고인 피도 나오다 나오다 못해 말라서 그만 나오는 것일까, 하는 상상을 했다. 하여간 피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청신호였다. 


 대뜸 지방행 기차표를 끊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화장실을 가서 패드를 갈지 않아도 된다면, 하루에 서너 번 정도만 패드를 갈면 된다면, 여행도 충분할 터였다. 여행을 가서 지친 마음과 자궁을 도닥이고 와야지. 힐링을 하는 데는 여행만 한 것이 없다고 어릴 적부터 생각해왔었다. 집이 아닌 어딘가에 서있을 때, 낯선 동네를 지도 없이 걸을 때, 마음에 안도감이 느껴지는 타입이었다. 집은 분명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는 달콤한 장소였지만, 또한 나를 가두고 있는 듯한 같은 풍경의 감옥 같기도 했다. 모두가 그렇게 느끼면서 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서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고, 몸이 괜찮기만 하면 계속 떠날 수밖에 없는 유전자가 내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사히 한 번 여행을 다녀오고 다시 한번 여행을 떠나려 숙소 앱을 뒤적이며 예약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야놀자와 여기 어때 앱을 켜고서 신나게 숙소들을 비교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에어비엔비로 해볼까? 큰 복통 없이 무사히 여행을 마친 뒤였기에,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가 권투 글러브를 끼고 내 배를 샌드백 삼아 친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화장실에 갔다. 또 피가 콸콸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팬티와 팬티 너머의 잠옷 바지까지 피가 흥건했다. 하- 나는 예상 못한 듯 예상할 수 있었던 이 상황에 담담한 듯 오버나이트 패드를 꺼내 가로로 세로로 두개를 착용했다. 피 묻은 속옷을 서둘러 손으로 비벼 빨았다. 자궁이 나를 보며 비웃으며 읊조리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쉽게 괜찮아질 줄 알아? 나는 너를 괴롭히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기관이라고. 내 존재 이유가 뭔데. 잊지 마.”



그래, 그렇게 쉽게 떼어낼 수 있는 존재도,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최근 십여 년간을 달고 살아온 복통과 부정출혈이 호르몬 기구 하나로 쉽게 사라질리는 없었다. 다음 생에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수억 번 생각해봐야 달라질 것은 없었는데도,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이미 예약한 숙소의 취소 수수료를 확인했다. 일주일 전이었지만, 예약 즉시 수수료 50프로라고 빨간 글씨로 적혀 있었다. 어떡하지? 







 창 밖을 보니 11월인데 느닷없이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비비며 창밖을 응시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내가 사랑한 지구가, 내가 사랑한 서울이 맞나? 세상이 이렇게 이상하니까 내 자궁이라고 멀쩡할리가 없다는 생각이 스친다. 눈발은 똑바로도 아니고 옆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부메랑을 던지듯 나아가고 있는 듯한 기이한 감각이 일었다. 곯은 지구와 곯은 내 자궁. 


 창 밖 풍경과 푸른 빛이 떠오르는 내 복부를 번갈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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