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아 Jun 18. 2024

부다페스트에서 당근을 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서울살이 시절, 나는 프로 당근러였다.


나의 첫 당근 품목은 회사 연말 상여를 받아 큰맘 먹고 산 첫 명품 가방이었다. 더스트백 속에 고이 모셔만 두다 결국 돈이 필요해 당근 앱을 다운로드하였다. 가방을 팔고 나니 나는 소위 당근에 처음 입문한 사람들이 걸린다는 '당근 병'에 걸렸다. 당근 병은 집안 모든 물건(심지어 잘 쓰고 있는 물건 일지라도)이 당근 후보로 보이는 심각한 병이다. 세계여행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렇게 나는 따듯하다 못해 뜨거운 당근 온도를 유지했다.


동유럽 한달살기를 시작하며 유럽의 석회 물에 대해 익히 들었기에 샤워기, 세면대 필터를 미리 구입해 갔다. 그래도 동남아보단 물이 깨끗하겠지라는 마음으로 태국 한달살기때보다는 필터를 적게 챙겼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친절한 부다페스트의 에어비엔비 주인은 주방 싱크대 물을 마셔도 된다고 했지만, 세면대 필터를 끼고 물을 틀자 필터 색이 갈색도 아닌 검은색이 되어버렸다. 유럽인들은 이 물로 설거지하고 목도 축이며 잘 사는데 우리가 예민하게 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면 몰랐지 새까매진 필터를 눈으로 보고 나서는 도저히 이 물을 쓸 수 없었다. 안 본 눈 사면 모를까... 큰일이다. 필터가 부족할 것 같다.


바로 부다페스트에 사는 한국인들이 모여있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필터를 구한다는 글을 남겼다. 프로 당근러의 기질이 발동해 부다페스트에서 당근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나의 메시지는 빠르게 묻혔다. 굴하지 않고 여러 번 당근 시도 글을 올렸고, 기적처럼 한 분에게 연락이 왔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체와 호환되지 않는 필터를 가지고 계셨다. 어쩔 수 없지, 결국 필터 본체까지 모조리 구입하기로 했다.


당근의 암묵적 룰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구매자가 판매자 근처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린 부다페스트의 여행자인지라 관광지 중심부에 거주 중이었고, 판매자님은 부다페스트 외곽에 거주 중이셨다. 구글맵으로 판매자분의 위치를 찍어보니 지하철로 30분 정도 걸리는 곳. 걸어가기엔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생활비 부족으로 지하철비도 아껴야 했기에 우리는 공유 자전거를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당근 디데이! 문밖을 나섰더니 비가 오고 있었다. 이런... 비가 오는 날 자전거를 탈 수는 없었다. 약속은 지켜야 하니 부랴부랴 지하철 역으로 향했지만 급한 마음 때문인지 한 번도 타본 적 없는 지하철 표를 어떻게 구입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친절한 판매자님이 오늘은 날이 너무 안 좋으니 다음에 와도 좋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일주일 후 주말로 다시 당근 날짜를 잡았다.


다시 돌아온 당근 디데이. 하늘은 흐렸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당근 장소로 향했다. 자전거로 16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지만, 나의 운전 포비아(?) 때문에 우리는 35분이 걸려서야 약속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부다페스트 자전거 도로는 정말 잘 조성되어 있지만 인도가 아닌 차 바로 옆에 마련된 경우가 많았다. 나는 장롱 면허 소지자이자 자전거도 잘 못 타는 사람으로 빵빵대는 차들 속에서 차에 치이는 상상을 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자전거 도로를 달렸다. 당근 하려다 수명이 단축될 뻔했다. (심지어 추위에 자전거가 얼었는지 반납처리가 정상적으로 되지 않아 실시간으로 추가금액이 생겼다. 이게 무슨 고생인지...)


우여곡절 끝에 판매자님을 만났다. 판매자님이 건네주신 비닐봉지 속에는 필터가 2개가 덤으로 들어있었으며, 비타민까지 챙겨주셨다. 서울에서 당근을 할 때도 가격보다 더 큰 덤을 얹어주는 후한 판매자님들을 종종 만나곤 했는데, 그런 한국인의 인심이 부다페스트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날은 추웠지만 마음만큼은 따뜻했다.


당근 거래가 모두 성사되었으니 이제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 선택의 여지없이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아침 일찍 밥도 못 먹고 나와 온몸에 긴장을 한탓인지 심히 배가 고파왔다. 그래서 배를 움켜잡고 사람이 많아 보이는 아무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배를 채우고 나니 한껏 기분은 좋아졌지만 어버버 팁까지 내고 나니 장바구니 가득 3번이나 장을 볼 수 있는 가격이 나와버렸다. 하하. 교통비 아끼겠다고 (추위와 운전 포비아에) 벌벌 떨며 자전거까지 타고 당근을 했는데... 밥 한 끼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돈을 써버리다니. 이럴 거면 인터넷으로 필터를 주문하는 게 더 저렴했겠...


그래도 무작정 들어간 식당 음식이 맛있었으며, 타지에서 필요한 물품을 알뜰히(?) 구입해 깨끗한 물을 사용할 수 있으니 됐다, 라며 정신승리를 해본다. 하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